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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회퍼의 선한 능력으로 악보와 영상, 성도의 공동생활 요약정리본

by 인천열린 2023. 8. 15.

본 회퍼'의 선한 능력으로' 악보와 영상을 여기에 올립니다. 목사님께서 평소에 사랑했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에 관련된 자료를 올립니다. 

 

본 회퍼의 '선한 능력으로' 독일어 악보

 

'선학 능력으로' 번역곡 악보와 영상 

본 회퍼의 '선한 능력으로' 악보

 

성도의 공동생활 요약본

성도공동생활
C
ommunity Life of The Saints

저자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요약 및 엮음 : 김준성 목사

 

1장 성도의 교제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133:1-3)

 

. 가시적인 성도의 교제  

1. 성도들의 가시적인 교제 본 강의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대한 성경적인 규칙과 훈계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1:26-28 문화명령, 28:18-20 지상명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수도원의 은둔 생활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을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여타의 가시적인 성도의 교제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성도가 서로의 방문하여 그리스도를 발견함다른 성도들과 몸과 몸을 부대끼며 함께하는 것은 서로에게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됩니다. 성도들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를 몸을 받습니다. 영과 육으로 된 하나님의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도의 교제를 누립니다. 방문(심방)하는 사람이나 방문을 받는 사람은 고독한 중에 자신을 친히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마치 주님을 만나듯 경외심과 겸손, 기쁨으로 서로를 대하고 찾아온 성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주고받습니다. 형제와 단 한 번의 만남이 이토록 큰 축복을 가져온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날마다 사귐을 누리며 사는 것이 허락된 자들에게는 도대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이 열려 있는 것일까요! 성도의 교제는 영원한 복을 한시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3. 가시적인 성도의 교제의 다양함하나님께서 가시적인 성도의 교제를 선사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 형제가 잠시 방문하는 것, 함께 드리는 기도와 축복, 서로 위로하며, 심지어 손으로 쓴 편지를 통해서도 힘을 얻습니다. 이런 것들이 성도의 교제의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매 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도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각 그리스도인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서도 성도의 삶을 영위하기도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입니다.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짧은 시간 단 한 번의 만남에서부터 평생에 걸쳐 매일 이어가는 사귐입니다. 그 사귐에는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요일1:3-4)

 

.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

  4.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속함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서로에게 속(연합)합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성도(서로 지체가 됨으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그리스도라는 은혜의 파이프를 통해서)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고,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으로)선택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받아들여져 영원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한 성도들은 첫째, 구원과 의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찾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귐을 갖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서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말씀과 성품)하는 자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정신과 목적)를 통해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열되었던 옛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로 회복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1:10)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질과 본성, 실제 육신의 모습 그대로를 취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5. 그리스도에 의해 속량(贖良) 받은 사람이 한 형제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을 때, 그와 동시에 우리도 형제에 대한 긍휼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심판 대신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이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용서를 이제 우리는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바로 여기에서 형제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의 교회를 주 안에서...형제”(바울)라고 부릅니다. 형제는 그리스도에 의해 속량(贖良)되어 죄 사함을 받고, 믿음과 영생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진지하게 형제애(兄弟愛)를 갈망하며 나와 마주 서 있는 (아무리)경건한 사람이라 해도, 성도의 교제를 나누도록 인도된 형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가 가진 내면성과 경건한 성품이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행하신 구원(영생)이 우리의 형제 관계를 규정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행하신 일(구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6.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로를 소유함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과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그 사귐을 지속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귐이 더 분명하고 순수해질수록, 우리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역사하심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서로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로를 소유하며, 서로를 완전하게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더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불순한 갈망에 처음부터 작별을 고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것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이루지 못한 특별한 사귐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일 뿐,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성도의 공동체 생활을 영적인 현실에 있다. 

7. 하나님은 성도가 공동체에서 자신의 환상으로 살지 않게 하심그러므로 그리스도인 형제 공동체가 처음부터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이상(理想)이 아니라, 거룩한 현실(現實)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인간적인 현실이 아닌, 영적(靈的) 현실(現實)이라는 사실입니다. 수없이 많은 경우에 기독교 공동체는 이상(理想)에 기초해서 산 결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공동체에 첫 발을 들여놓은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흔히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에 관한 특정한 이상을 함께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종류의 모든 꿈이 신속히 깨어지도록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실망,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전반에 대한 실망과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우리를 짓누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으로 인도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한 은혜로써 우리가 단 몇 주간이라도 자신의 환상 속에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며, 우리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즐거운 체험들과 행복한 도취 속에 내어 주지 않으십니다. 모든 불쾌하고 악한 모습에 환멸을 느낀 공동체야말로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실망과 낙심이 개인에게나 공동체에 빨리 찾아올수록, 양자에게 훨씬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상에 집착하는 공동체는, 그 이상이 깨어지는 순간 성도의 공동체에 주어진 약속마저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러한 공동체는 언제든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속으로 함께 가지고 들어온 인간적인 이상은 참된 공동체를 방해하므로 반드시 그 (인간적인)이상이 깨어져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참된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꿈을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사람이라 해도, 결국 모든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고 맙니다. 

8. 성도의 공동체에서 자기의 이상을 추구하지 말라그리스도인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도 감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큰 것도 받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선물에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준비해 놓으신 더 큰 영적인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이미 주어진 작은 영적인 인식과 체험, 사랑 따위에 감사해서는 안 되며, 항상 더 큰 은사만을 열렬히 사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는 허락된 커다란 확신과 강한 믿음, 풍성한 체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 앞에 한탄하며, 이러한 불평을 (믿음에서 나온)경건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소속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대해 날마다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모든 것이 우리 기대와는 달리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다며 불평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경륜과 부유함을 따라 우리 공동체를 성장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게 됩니다. 자신이 부름 받아 소속된 성도의 공동체와 어긋나서 정죄하고 고발하는 자가 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 깨어져야만 할, 인간적인 이상이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지 우선 자기 자신부터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9. 성도의 형제애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주님의 교회를 고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합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불신을 한탄하며, 자신의 실패와 특별한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마치 성도의 성화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우리의 성화가 그러하듯이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에게는 약하고 미천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영적 현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의 공동체의 근거와 힘과 약속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며 배우게 될수록, 우리는 공동체에 대해 더욱 고요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며 소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도의 공동체에서 영적인 유익을 누려라. 

10. 성도의 공동체는 정신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인 실재다.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근거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정신적 실재가 아닌 영적인 실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모든 영적 현실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정신적 현실의 기초는 어둡고 투명하지 않은 인간 영혼의 갈망과 충동입니다. 영적인 사귐의 기초는 진리이며, 정신적 사귐의 기초는 욕망입니다. 영적인 사귐은 그리스도에 의해 부르심 받은 자들의 교제이며, 정신적 사귐은 경건한 듯한 영혼들의 교제입니다. 영적인 공동체에서는 형제끼리 서로 섬기는 밝은 사랑, 즉 아가페가 살아 숨 쉬지만, 정신적 공동체에서는 경건한 듯 하면서 불경건한 충동의 사랑, 즉 에로스가 작열하고 있습니다. 영적 공동체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다스리지만, 정신적 공동체에서는 말씀 외에도 특별한 능력이나 체험, 암시적이며 마술적인 기질을 가진 인간들도 함께 지배합니다.  

11.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이웃 사랑'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것은 내가 최고의 사랑의 행위로 최고의 희생을 감당할지라도, "사랑(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사랑하지만,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타인을 사랑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참된 사귐을 위해 참되지 못한 사귐을 중단하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자신을 반대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본질상 욕망이며, 따라서 인간적인 공동체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이러한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한 이 열망도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는데, 그것은 진리를 위한 것도 타인에 대한 참사랑 때문도 아닙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사심 없이 섬기는 진실한 영적인 사랑을 만나면 개인적인 미움으로 변해 버립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목적'인 동시에 '업적'이자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하며, 모든 것을 그 아래 굴복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섬깁니다. 영적인 사랑은 타인에게 직접 다가갈 수 없음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타인 사이에 계십니다. 무엇이 타인에 대한 사랑인지는 인간적인 사랑에서 성장한 사랑의 보편적 개념에 기초한 선지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도리어 미움이며, 가장 사악한 이기심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영적인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랑은 위로부터 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2.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가 서로 교제함그리스도께서 나와 타인 사이에 계시므로, 나는 타인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갈망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이 된 그 말씀을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타인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타인을 오직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는 명제의 뜻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타인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상을 만들고는, 그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느니,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사랑은 타인이 인생을 자기 손아귀에 붙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타인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식합니다. 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각인해 놓으셨고, 또 각인하길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13. 영적인 사랑 그러므로 영적인 사랑이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타인을 그리스도께 맡기느냐의 여부에 따라 진위가 드러납니다. 영적인 사랑은 타인에게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거나, 타인의 삶에 불순하게 개입하여 영혼을 뒤흔들어 놓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경건한 심리적 과열이나 자극을 기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타인을 만납니다. 인간의 영혼에 기초한 사랑은 인간적인 예속과 속박을 초래하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지만, 영적인 사랑은 형제로 하여금 말씀 아래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온실에서 인위적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라면, 영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서 비바람을 맞고 햇빛을 받아 건실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열매들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 결론과 적용

14. 영적인 교제와 정신적인 교제의 차이를 구별하라 인간적인 이상과 하나님의 현실, 영적인 사귐과 정신적인 사귐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제때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모든 기독교 공동생활의 존폐가 달려 있습니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겉보기에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생활 공동체에서 축출하는 것은, 정말이지 가난한 형제 안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내쫓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매우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정신적인 것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영적인 유익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연합'이라는 말씀은 "형제가 그리스도를 통해 동거함"을 의미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연합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형제애(兄弟愛)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형제애(兄弟愛)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믿음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미 행하셨고, 또 우리에게 행하려 하시는 일을 우리는 믿음 안에서 주시려는 최상의 선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2장 함께하는 날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내가 주를 의뢰합니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옵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드나이다.”(143:8)

 

 

15. 하루의 첫 생각이나 말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우리가 이른 아침 삼위일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찬양을 다시 배우기를 원한다면, 다시 말해 어두운 밤에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우리가 새 날을 맞이하도록 깨워 주시는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위해 무덤과 지옥을 이기시고 우리 가운데 승리자로 서 계신 세상의 구주 성자 하나님, 이른 아침에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추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모든 흑암과 죄악을 쫓아내시고 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는 성령 하나님께 이른 아침 드려야 할 찬양을 다시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뜻을 같이하여 동거하는 형제들이 밤이 지난 후 그들의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고 함께 말씀을 들으며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다시 모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루의 첫 생각이나 말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6. 이른 아침 공동기도회믿음의 사람들은 동터 오는 이른 아침에 하나님을 목마르게 찾으며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루의 시작은 일상의 잡다한 일들로 인해 짓눌리거나 괴롭힘 당해서는 안 됩니다. 새날은 그날을 지으신 주님께서 주관하십니다. 밤의 칠흑 같은 어둠과 어수선한 꿈들로 인해 산란해진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선명한 빛과 영혼을 일깨우는 말씀 앞에서만 물러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불안과 불순함, 모든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는 잡다한 상념이나 수없이 많은 무익한 말들을 잠재우고, 우리가 하는 첫 생각과 말이 우리 전 인생의 주인이신 분께 드려지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상하리만큼 자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으며, 야곱과 모세, 여호수아가 그러했습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 자신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불안과 근심으로 인해 일찍 일어나는 경우도 있는데, 성경은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경우도 있는데, 성경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침 시간의 공동 기도회에는 성경 강독과 찬양, 기도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공동체가 다양한 만큼 아침 기도회의 모습도 다양하며, 또 그렇게 다양한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모든 공동기도회 시간에는 성경 말씀과 교회의 찬양, 공동체의 기도가 빠져서는 안 됩니다.

 

17. 공동으로 드리는 시편 기도에 특별한 의미이제 공동 기도회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예로부터 교회는 공동으로 드리는 시편 기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왔습니다. 지금도 공동 기도회를 시편으로 시작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몇 안 되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동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기도들 또한 엄연히 성경 말씀이며,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기도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 “종교적인 전 단계로 치부하며 폐기해 버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기도하고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시편 전체를 통해 기도하고 계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성경과 교회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증언하였습니다. 시편은 가장 참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편으로 기도하셨기에 이제 시편은 모든 시대를 위한 그분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시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말씀일 수 있는지, 그 해답은 기도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거기서 우리를 만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이나 교회가 시편으로 기도드릴 때면,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천국 보좌 앞에서 함께 기도드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속으로 휩싸여 들어가서 기도하기 때문에, 그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18. 그리스도의 몸의 기도를 함께 드리는 법 우리는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기도를 근거로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시편은 위대한 기도의 학교입니다. 첫째, 우리는 여기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계시된 말씀의 확고한 기초위에 있는 것이지, 막연하고 이기적인 소원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둘째, 시편의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배웁니다. 시편 기도의 폭이 개인의 경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그런데도 각 개인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기도 전부를 드리고 있습니다. 셋째, 시편 기도는 공동체로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다시 말해 시편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며, 한 개인으로서 내가 드리는 기도는 교회가 드리는 전체 기도의 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기도를 함께 드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관심사를 넘어서서 사욕이 없는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19. 성경 전체를 읽는 것에 대하여그 다음에 성경 읽기가 이어집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우리가 공동으로 성경 읽기를 바르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각종 해로운 선입견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이, 성경을 읽을 때 오늘 하루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짧은 몇 구절만을 뽑아 읽는 것이 성경 읽기의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매일의 묵상을 위해 뽑아 놓은 성구 그 이상입니다. 성경은 오늘의 양식이 되는 말씀 이상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를 위한, 그리고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공동 기도회 시간에는 시편 기도 외에도 좀 더 긴 구약과 신약 말씀을 봉독하는 순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공동체는 아침과 저녁에 구약 한 장, 신약은 적어도 반 장을 읽고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는 이 분량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 과도한 것처럼 느껴져서 반발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구약 한 장을 전체 맥락 속에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성인 그리스도인에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깊은 수치심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몸, 즉 살아 있는 전체이기 때문에 가정교회의 성경 읽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연독의 방식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예배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서들 속에서 아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한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어났던 사건에 참여하게 되며,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면서, 함께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 요단 강 너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함께 의심과 불신에 빠지기도 하고, 징계와 회개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20. 자립적으로 성경을 읽기하나님께서 오늘 내 인생에 두신 뜻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일이 우리에게 실제로 더 중요합니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내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유일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처럼,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알고 이해했던 것처럼, 그렇게 성경을 다시 배우고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만 합니다. 자립적으로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어떻게 곤경과 시험에 빠진 그리스도인 형제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금방 힘을 잃고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21. 시편찬송시편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은 다음에는 공동 찬송이 이어집니다. 이 찬송은 다름 아닌 찬송하고 감사하며 간구하는 교회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찬송은 가정 공동체가 이른 아침에 부르는 찬양이며, 하늘과 땅위의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부르는 새로운 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노래를 함께 부르도록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하나의 유일하고 위대한 찬양을 영원 속에 준비해 두셨는데,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찬양을 함께 부르게 됩니다. 매일 아침 지상의 교회는 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고, 저녁에는 이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마칩니다. 이때 찬송하는 내용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업적입니다. 땅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와는 다릅니다. 땅에서 믿는 자들의 노래이지만, 하늘에서는 바라보는 자들의 노래이며, 땅에서는 가련한 인간의 말로 부르는 노래지만, 하늘에서는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말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리의 새 노래는 지상의 노래이며, 아침 해가 솟아오르듯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는 길을 밝혀 주는 순례자와 예배자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부르는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매여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은 이 땅의 아이들이 부르는 소박한 노래입니다.

 

22. 예배와 찬송교회의 예배 찬송은 본질상 하나의 음으로 된 찬송이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찬송이 오직 말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정교회의 예배 찬송은 더욱더 한 음으로 된 찬송이 바람직합니다. 이렇게 한 음으로 된 찬송을 부를 때, 말씀과 음색이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결합합니다. 단성 찬송의 자유로이 떠도는 음색은 오직 노래로 부르는 말씀에 자신의 유일하고 본질적인 내적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배 중에 찬송할 때만큼 허영심과 그릇된 취향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버리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우선 즉흥적인 제2의 음이 있는데, 이것은 함께 모여서 노래하는 곳이라면 거의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제2의 음은 불완전한 단성의 음색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꼭 필요한 기초를 제공하려는 것이지만, 결국 말씀과 음색 모두를 죽이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23. 공동기도회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찬송, 우리의 기도는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공동 기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기도회 순서에서 공동 기도만큼 곤란과 어려움을 일으키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동 기도를 할 때는 우리 자신이 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 기도회에서 드리는 자유로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개인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여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에게 위탁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공동체의 일상생활을 함께 경험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들의 근심과 곤궁, 그들의 기쁨과 감사, 그들의 기도와 소망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심정과 공동체의 마음을 혼동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명에 의해서만 인도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항상 자신을 검증하고 깨어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유로운 기도에도 일정한 내면의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기도란 사람의 심정에서 혼란스럽게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이 잘 정돈된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특정 기도제목이 날마다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로서 짊어지고 있는 간구를 매일 반복하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단조롭게 느껴지겠지만, 후에는 분명 우리를 지나친 개인주의적 기도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24. 노동과 기도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생활 공동체의 아침 기도회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교회의 찬양, 교회의 기도로 우리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감사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교회는 주의 손에서 일용할 양식을 받습니다. 하루를 여는 아침 시간이 지난 후, 그리스도인의 하루는 저녁이 되기까지 노동하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 도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가정은 긴 노동 시간으로 인해 온종일 서로 떨어져서 생활합니다. 기도와 노동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일입니다. 기도가 노동을 방해해서도 안 되지만, 노동이 기도를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루는 기도와 노동이라는 이중적인 일로 특정 지어져 있습니다. 기도 역시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하루의 긴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노동이 제각기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확보하는 곳에서만, 기도와 노동이 끝없이 영구히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하루의 수고와 노동이 없다면 기도를 기도라 할 수 없고, 또한 기도가 없다면 노동을 노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노동은 사람을 사물의 세계 속에 세웁니다. 노동은 사람에게 행위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노동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주어진 책무에 의해 제한하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노동은 육체의 안일과 게으름을 극복하게 하는 구원의 수단이 됩니다. 기도는 하루 전체를 포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노동을 중단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노동을 장려하고 긍정하며 노동에 진지함과 즐거움을 더해 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 노동은 모두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25. 아침기도와 일과 후 기도하루 생활의 질서는 아침 기도에서 구하고 찾아지며, 일하는 동안 아침 기도의 소중함이 증명됩니다. 이른 아침 기도가 그날 하루를 결정합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허비해 버린 시간, 우리가 걸려 넘어지는 유혹, 일하면서 용기를 잃고 무력해지는 것, 우리의 생각이 혼란스럽거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은, 대부분 아침 기도를 소홀히 하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났습니다. 신앙을 지키기에 하루는 너무 길며, 내일은 내일대로 걱정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 공동체는 다시 모입니다. 저녁의 식탁 교제와 마지막 기도회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여기서 저녁 기도에 대해 몇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저녁 기도의 자리는 특별히 공동의 중보기도를 위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노동이 끝난 후, 우리는 우주적인 교회와 우리가 몸담은 지역 교회, 직분을 맡은 목회자, 모든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죽음을 앞둔 사람들, 우리의 이웃들, 우리의 고향과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축복과 평화를 내려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손을 멈추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에 내어 맡기는 시간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또 있을까요?

 

 

 

 

 

 

 

 

 

 

 

 

 

 

 

 

 

 

 

 

 

 

 

 

 

 

 

 

 

3장 홀로 있는 날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시편65:1)

 

 

26. 그리스도 앞에 홀로 선 사람만이 그분의 공동체에 들어옴 많은 사람은 고독이 무서워서 공동체를 찾습니다. 그들은 더는 홀로 있을 수 없으므로, 사람들 속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혼자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도움을 얻기를 바라며 공동체를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실망을 맛보며, 그 후에는 자신의 잘못이 마치 공동체의 잘못인 양 비난의 화살을 퍼붓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정신 요양소가 아닙니다. 자기 도피의 길로 공동체를 찾는 사람은 공동체를 인간적으로 접근하여 잡담이나 하고 기분을 전환하는 곳으로 왜곡시켜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공동체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과 공동체에 해를 끼칠 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여러분은 홀로 그분 앞에 서야 하며, 홀로 그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홀로 여러분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 홀로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홀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인생을 결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홀로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이며,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 저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외롭게 죽음과 대면하여 씨름해야 한다. 그 시간에 나는 여러분 곁에 있을 수 없고 여러분도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마르틴 루터)

 

2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홀로 있을 수 있음그러나 반대로 다음 문장도 유효합니다. 성도의 교제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은 여러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여러분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의 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그리고 심판의 날에도 여러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성도의 교제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28. 성도의 말과 침묵도의 교제의 특징이 이라면, 고독의 특징은 침묵입니다. 침묵과 같은 말은 홀로 있음과 성도의 교제와 마찬가지로 다르면서도 내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어느 한쪽도 다른 한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말이 잡담이 아닌 것처럼, 침묵은 무언이 아닙니다. 무언이 고독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며, 잡담이 성도의 교제를 이루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에 다시금 근거를 제시하고 든든하게 결속시켜 주는 말씀은 침묵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침묵하는 이유는 오직 말씀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진정한 영광을 돌리며 말씀을 영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침묵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을 받은 후 그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잡담이 판치는 이 시대에 침묵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의 침묵은 온종일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서 침묵하는 법을 터득했다면 침묵과 말로 하루를 살아가는 법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침묵 가운데는 용납될 수 없는 침묵, 즉 제멋에 겨워 교만하고 눈에 거슬리는 침묵도 있습니다. 이미 여기에서 침묵 자체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듣는 침묵이며, 겸손으로 인해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겸손한 침묵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매인 침묵입니다.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27:9)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37:7)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62:5)

 

29. 그리스도인의 하루에 홀로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까닭성경묵상과 기도, 중보기도가 그것입니다. 묵상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이라는 단어는 교회가 옛날부터 사용해 온 말이며, 종교개혁 시대에도 사용된 말입니다. 묵상 시간은 개인적인 성경 묵상과 개인적인 기도, 개인적인 중보기도를 위한 것입니다. 묵상 시간은 우리가 홀로 있는 공허함과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홀로 대면하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묵상 시간은 우리가 서 있을 든든한 토대를 제공해 주며, 우리가 내디뎌야 할 걸음, 즉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묵상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말씀을 약속에 기초하여 읽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주 인격적으로 오늘 하루를 위해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 문장 각 단어가 인격적으로 우리 마음에 부딪혀 올 때까지, 그 말씀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설교자들의 경우라면, 그 본문으로 어떻게 설교하며 가르칠 것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본문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이는 성경 주해나 설교 준비, 성경 공부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자세로 배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6:4)

 

30. 묵상과 중보기도우리는 묵상할 때 예기치 않은 비범한 경험을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경험이 없더라도 묵상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묵상을 시작할 때도 그렇지만, 우리는 거듭 반복해 메마른 내면과 무관심, 싫증으로 인해 도무지 묵상할 수 없는 내면 상태를 대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에 얽매여 묵상을 중단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이럴 때 더욱더 인내와 신실함으로 묵상 시간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성경 묵상은 기도로 인도합니다. 성경 말씀으로 인도받고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기도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의 공허함 속으로 빠져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에 기꺼이 동화되고자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형제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그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은혜가 필요한 가련한 인간이자 죄인으로 보게 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를 밀쳐내려는 모든 마음은 사라지고, 나는 그의 필요와 곤경만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의 곤궁과 죄는 마치 나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아주 크고 무겁게 느껴질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고 그분의 긍휼을 덧입을 수 있는 우리에게 부여된 권리와 똑같은 권리를 형제에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31.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복된 사람마지막으로, 우리는 중보기도의 섬김이 시간을 드려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전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목사들은 중보기도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바르게 드려지는 중보기도는 그것만으로도 매일의 묵상 시간을 채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에서 중보기도가 모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에는 측량할 수 없이 큰 약속이 주어져 있기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 약속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일과를 마치고 그리스도인 가정 공동체로 돌아온 사람은, 홀로 있으면서 받은 축복을 가지고 돌아오며, 그 자신도 새롭게 공동체의 축복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능력 안에서 홀로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홀로 있음의 능력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 나가는 사람도 복된 사람입니다.

 

 

 

 

 

 

 

 

 

 

4장 섬김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9:46)

 

 

32.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불화의 씨누가 이(9:46) 같은 생각을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에 뿌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형성 되는 곳마다 이미 이러한 생각이 불화의 씨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서로 관찰하고 판단하며 분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생성되는 순간, 이미 눈에 보이지도 않고 때로는 아예 자각하지도 못한 채, 생사를 건 무시무시한 싸움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맙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진지를 구축하려 합니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가 생깁니다. 강하지 않은 자는 약자가 가진 권리를 움켜쥐고, 이것을 강자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합니다. 여기서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단순한 사람과 까다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과 덜 경건한 사람, 사교적인 사람과 별난 사람이 나타납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 정당화를 오직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심판하는 데서 찾으려합니다. 자기 정당화와 심판은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34. 공동체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눈우리의 악한 생각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악한 생각을 전혀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 생활의 결정적인 규칙은 형제에 대한 은밀한 말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고자 하는 권면까지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은밀한 말은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4:29) 이와 같이 처음부터 혀를 훈련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비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타인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일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또한,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자리에 두고,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주신 것은 그를 지배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형제 너머에 계신 창조주를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전에는 나를 성가시게 하고 괴롭게만 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의 피조물 된 자유 속에서 기쁨의 이유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즉 나 자신의 형상대로 다른 사람을 뜯어고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공동체 안에는 강함이나 약함, 영리함이나 어리석음, 유능함과 무능함, 경건함과 경건치 않음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동체 안에 있는 전혀 다른 개인의 모습은 더는 왈가왈부할 일도, 판단하고 정죄하며 자기를 정당화할 근거도 되지 못하며,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서로 기뻐하며 서로 섬겨야 할 이유가 될 뿐입니다.

 

35. 그리스도인의 낮아짐과 섬김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자기 정당화에서 나오는 폭력 행사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稱義)에 기초한 섬김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후로는 오직 섬기려고만 할 것입니다. 섬김을 배우려는 사람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12:3)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알고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고상하고 유익한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는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생각할 수 없으므로, 자기 자신의 계획과 의도를 낮게 평가하게 됩니다. 또한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뜻이 꺾이는 것이 다행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웃의 뜻을 자기 뜻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하게 여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해서 해가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웃을 섬기는 것이 자기 뜻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낫지 않겠습니까? 자부심이 강한 그리스도인은 저항도 불러일으킵니다. 이 말이 너무 과장되고 진실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사도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맥락에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자신을 이러한 깊이까지 인도하지도 못하는 죄 인식은 참된 죄 인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죄가 다른 사람의 죄에 비해 더 작게 보이거나 덜 사악해 보인다면, 내가 나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러한 겸손의 깊이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36.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형제의 바른 섬김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①첫 번째 섬김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해야 한다고 여기며,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섬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섬김이 될 수 있음을 잊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 들어줄 사람을 찾지만,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형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머지않아 하나님께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도 항상 말만 하려고 들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죽음(은혜의 없음)이 시작되며, 결국 남는 것은 영적인 수다뿐입니다. 형제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와 설교의 근본적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의 사명과 함께 청취의 사명까지 함께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섬김은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사소하고 외적인 일을 겸손하게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삶 속에는 자잘하게 도울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장 작은 섬김이라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미천하고 몸으로 하는 외적인 일을 돕느라 귀한 시간을 공연히 낭비하고 있다는 염려는, 대개 자기 일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는 데서 기인합니다. 날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사랑과 긍휼을 행하는 손을 아끼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말씀을 신뢰성 있게 기쁨으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섬김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법입니다. 오직 다른 사람의 짐을 지게 될 때만, 참으로 형제가 되고 지배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짐은 하나님에게도 너무 무거워서, 그 짐을 십자가 위에서 짊어지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실제로 참고 감당하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목자가 잃은 양을 품에 안으시듯 인간의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성경은 '짊어진다.'는 말을 이상할 정도로 많이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짐을 알고 함께 경험해야만 하는 십자가 공동체입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알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법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짐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자유입니다. ‘타인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거스르지만,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자유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진다는 것은, 타인이 피조 된 그 현실을 견뎌 내는 것이며, 타인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고, 또 참고 감당하는 가운데 타인에 대한 기쁨에 이르기까지 돌파해나가는 것입니다.

 

37. 타인의 죄를 감당하는 것 : 용서와 받아들임그리스도인에게 죄는 형제에게 지우는 짐이 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자유가 죄 속에서 악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하는 것은 그의 자유를 감당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짊어짐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비로소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죄인을 멸시하지 않고 그의 죄를 짊어지며 감당하는 것은, 그가 버린바 되었다며 포기하지 않고 그를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의 섬김은 한 사람이 타인에게 날마다 행해야 하는 섬김입니다. 용서의 섬김은 말없이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섬김에 싫증을 내지 않는 공동체의 모든 지체는, 형제들이 자신을 똑같이 섬기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어도 될 것입니다. 자진해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자신도 짊어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며, 오직 이러한 능력 안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타인의 짐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귀 기울이는 섬김, 적극적인 도움의 섬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섬김이 신실하게 행해질 때 궁극적인 것이자 최고의 것,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38.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해야 할 때말씀에 대한 자신의 책임 앞에 경외심을 갖게 되면, 타인에 대한 경외심이 따라오게 됩니다. 한 형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 이 말은 영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저주의 말씀 아래 있습니다.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리스도인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에서는, 언제든 그리고 어떻게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증언해야 할 때가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형제들끼리 서로 나누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해야 할 결정적인 섬김을 알면서도 행치 않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서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버림받고 잃어버린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39. 형제를 훈계와 훈육해야 할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또한 심한 비판과 권면까지도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고, 객관적으로 우리 자신의 말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너무 예민하고 허영심으로 가득하여 형제의 진지한 말을 거절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겸손하게 진리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 형제가 공공연한 죄에 빠졌을 때, 그를 훈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의 훈육은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부터 연습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 공동체의 가르침과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어 전 교회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주저 없이 권면하고 징계하는 말씀이 주어져야 합니다. 형제를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준엄한 훈계보다 더 자비로운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심판하고 도우면서 우리 사이에 거하게 하는 것이 긍휼의 섬김이며, 참된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선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20:26) 예수님은 공동체 내의 모든 권위를 형제에 대한 섬김과 연관시키셨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오직 듣는 섬김과 돕는 섬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섬김, 선포의 섬김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존재합니다.

 

40. 결론과 적용신약성경은 인간적 재능의 마력이나 영적인 인물의 빛나는 성품에 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감독은 소박한 사람이며, 믿음과 생활에서 건전하고 신실한 사람으로서, 교회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 예수님과 형제들을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뛰어난 사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신실한 예수님의 종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소박하게 섬기는 사람에게 신뢰를 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간의 지혜나 생각이 아니라, 선한 목자의 말씀으로 인도받아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지위는 자신의 권위를 구하지 않고, 형제들 가운데 한 형제 된 자로서 오직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예수님의 종에게만 주어집니다.

 

 

 

 

 

 

 

 

 

 

 

 

 

 

 

 

 

 

 

 

 

 

 

 

 

 

 

 

 

 

 

 

5장 죄 고백과 성찬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야고보서5:16)

 

 

41. 부끄러움이 있을지라도 공동체로 나오라자신의 죄악과 함께 홀로 머무는 사람은, 완전히 고독한 외톨이 신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공동 기도회와 합심기도와 섬김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갖는 각종 성도와의 교제에도 불구하고, 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에 이르는 마지막 돌파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머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 있고 경건한 자로서만 서로 교제할 뿐, 경건치 않은 죄인으로서는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공동체에서는 그 누구도 죄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과 공동체 앞에서 자기 죄를 숨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여러분을 원하시며, 여러분에게서 희생이나 공로 같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여러분만을 원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42. 성도의 공동체에 외식을 버리고 나오라기뻐하십시오! 이 메시지는 진리를 통해서 주어지는 자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사람 앞에서 쓰고 있는 가면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시며, 여러분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육신 안에서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어도 좋으며, 오직 그럴 때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가식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죄인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긍휼,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분의 교회는 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형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서 있습니다. 형제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위선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넓은 세상 가운데서 오직 형제 앞에서만, 나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 죄인이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긍휼이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43. 죄의 아성이 무너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는 형제들 사이에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라는 요청이 있습니다. 이러한 요청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나아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성도의 교제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집니다. 죄는 인간과 홀로 있기를 원합니다. 죄는 그로 하여금 성도 간의 사귐을 멀리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외로워지면 외로워질수록, 죄의 권세는 더욱더 파괴적이 됩니다. 또한 인간이 죄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 갈수록, 외로움은 더욱더 절망적이 됩니다. 그러나 죄 고백을 하게 되면 복음의 빛이 어둠 속 깊이 닫힌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죄는 빛 가운데 밝히 드러납니다. 말하지 않고 숨겨져 있던 것이 공개적으로 말해지고 알려지게 됩니다. 모든 비밀과 숨겨져 있던 것들이 이제 백주에 드러납니다. 죄를 인정하고 입술로 죄를 고백하기까지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자기 정당화의 마지막 아성이 무너져 내립니다.

 

44. 공동체에서 죄 고백의 효과죄인은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고, 자신의 모든 죄악을 내려놓으며, 하나님께 그의 마음을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들과의 사귐 속에서, 그의 모든 죄가 용서된 것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 고백이란, 오직 두 명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죄 고백을 말합니다. 전체 교회와 사귐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전 교회 성도 앞에서 죄를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 준 형제 안에서, 전체 교회가 이미 나를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한 형제와의 사이에서 다시 발견한 사귐 속에서, 이미 전체 교회와의 사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죄 고백 속에서 십자가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집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길 원하며, 나는 나에 대한 권리가 있고, 나의 미움이나 욕망에 대해,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해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인간의 영과 육은 교만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그의 죄악 속에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죄 고백은 나를 아프게 하며 작아지게 만듭니다. 죄 고백은 교만을 무섭게 쳐서 무너뜨립니다. 형제 앞에서 죄인으로 서는 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치욕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옛사람은 형제의 눈앞에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45.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괴멸된 죄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행악자로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만이 우리를 죄 고백이라는 치욕스러운 죽음 속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교만을 멸망시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을 발견하도록 하신 장소, 즉 죄인의 공공연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꺼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죄 고백 속에서 죄인의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지기를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참된 사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죄 고백 속에서 새 생명으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집니다. 죄를 미워하고 고백하며 용서함을 받는 곳에서,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집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죄와 관계가 끊어지는 곳에 회심이 있습니다. 죄 고백은 곧 회심입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신 것입니다. 죄 고백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버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죄의 권세는 무너졌습니다. 지금부터 그리스도인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게 됩니다.

 

46. 누구에게 죄를 고백하는가? 형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뜻입니까? 죄 고백은 율법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선물입니다. 물론 죄 고백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로 확신과 새 생명, 십자가와 성도의 교제로 돌파해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 고백은 누구에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약속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다른 사람의 죄 고백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과연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삶은 우리보다 고결하기에, 우리의 개인적인 죄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리를 외면해 버리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사는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간과 자신의 깊은 죄성을 인식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죄도 낯설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아래 있는 형제만이 나의 죄 고백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죄 고백을 들어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삶의 경험이 아니라, 십자가 체험입니다. 인간에 대해 가장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거하는 소박한 그리스도인이 아는 만큼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 형제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자신과 같은 죄인임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살던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갈망하며 죄 고백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 고백을 들어주는 데 인색하고 서투르다면, 그것은 심리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에는 또한 형제 사이의 죄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47. 죄 고백의 위험성을 경계하라죄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두 가지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첫째 위험은 죄 고백을 듣는 사람과 관계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죄 고백을 듣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너무 과중한 부담이 되기 쉬우며, 그 결과 죄 고백이 그에게 공허한 행위가 되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위험은 죄를 고백하는 자와 관계된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자는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죄 고백이 경건한 공로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죄 고백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 자체로 완결된 행위이며, 공동체에서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죄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 공동으로 거룩한 성찬을 준비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화해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 누구도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48. 죄의 고백과 성찬성찬을 준비하는 가운데 모든 개인의 마음에는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특별한 죄에 대하여 용서의 확신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깁니다. 이렇게 갈망하는 마음에서 형제들 사이에 죄 고백이 이루어지며, 사죄의 은혜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하시는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죄 사함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형제의 모든 죄를 용서할 때, 하늘의 천사들은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으로 인해 기뻐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찬을 준비하는 시간은 형제들의 권면과 위로가 가득한 시간이며, 기도와 떨림과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입니다. 성찬을 하는 날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허락된 가장 기쁜 날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형제들과 더불어 화해하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은혜를 영접하며, 그 안에서 용서와 새 생명, 행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새로운 사귐이 그들에게 선사된 것입니다. 거룩한 성찬의 교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완성 그 자체입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주님의 식탁에서 살과 피로 하나가 된 것처럼, 그들은 영원히 서로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기쁨은 완전해집니다. 말씀 아래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은 성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