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장1-11절 주전20240707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1)
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오늘 가난 혼인잔치에서 무엇인가를 계시하셨습니다. 단순한 물리적인 변화에만 집중하면 성경의 의도가 아닐 것입니다. 가장 낮은 기적입니까? 가장 사소한 기적입니까? 물리적으로 볼 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구주의 지적인 본 기적은 계시된 의미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고,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셨고, 지금은 그 원리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권세로 지배당하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택하신 자들을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아드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성취하실지 계시하신 기적과 그에 따른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적을 물리적으로만 볼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적에 담긴 의미와 주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기적에서 독특한 구원방식과 유일한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베푸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몇 가지를 생각하겠습니다. ❶첫째, 혼인 잔치에서 독특한 구원방식을 보이셨습니다. ❷둘째, 구원사역의 출발점에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❸셋째, 가난 혼인잔치에서 먼 훗날 성취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베푸실 혼인잔치”를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요, 왕이신 분이 “인자”로서 구원사역을 펼치심
1.1. 첫째, 혼인 잔치에서 독특한 구원방식을 보이심
이 독특한 구원방식은 1장의 “나다나엘에게 대답하신 내용”에서 시작됩니다. 뱃새다 사람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이 빌립의 전도에 따라 주님을 만났습니다.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주님 앞에 압도당한 나다나엘은 아주 명료한 신앙고백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이에 대하여 주님은 자신을 “인자”(51절)로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니락 하는 것을 보리라.”(51절) 사실상 이 말씀은 주님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실지 선언하신 대 선언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방식을 이 기적과 말씀에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기적을 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옳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낮은 수준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담긴 면에서는 매우 적절한 기적입니다. 그 구원방식을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으로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 담긴 내용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갈릴리 가나, 본문의 기적을 보이신 동네 사람입니다. 요1:49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 고백이 맞다고 주님이 인정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결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위 위세와 왕의 권세로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구원하실 주님의 방식은 “인자”입니다. 즉 철저히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와 정치권력이 취하는 방식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하늘의 영광 대신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죄와 사망으로 죽은 우리를 권하시겠다는 일종의 선언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모습으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눈 높이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천한 곳에 내려오셨습니다.
1.2. (나다나엘에게)첫 설교와 (혼인잔치)의 기적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우리 주께서는 제자를 부르시고 이튼 날 그들과 함께 갈릴리를 향해서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요한, 안드레, 시몬, 빌립, 나다나엘 다섯 사람이 갈릴리사람들입니다. 요한, 안드레, 시몬 및 빌립의 고향은 갈릴리 벳새다이고, 나다나엘은 가나 사람입니다. 빌립을 부르셨던 그날로부터 계산해서 사흘(요2:1)이 지났습니다. 그리하여 가나에 사흘째에 도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자들에게 감추시며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의 모습으로 인류구원의 목표를 향하여 출발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인자”는 이스라엘에 언젠가는 구원주로 오실 것을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여기 가나에 오셔서 가장 낮고, 그 어떤 기적보다도 높지 않은 기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곤란한 상황, 이 안타까운 상황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인 바로 낮아지심의 원리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절대적인 관계와 이 땅의 죄와 사망권세에 짓눌려 있은 인생들과의 관계를 함께 가져가신 것입니다. 인자 사상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낮아지심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원리가 크다는 것입니다. 낮아지심의 원리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꿰뚫었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구원하신도 그렇고 우리의 신앙은 낮아짐의 원리 안에 역사됩니다. 반드시 낮아짐의 원리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소유와 지위에 오르더라도 낮아짐의 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섬김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리에 승리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원리요, 구원받은 자들이 갖춰야 할 믿음의 기본자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제자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 이것은 주님의 원리요, 우리가 살아가야 한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2. 새로운 출발점에서 기적
❷둘째, 구원사역의 출발점에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1. 공생애의 출발점 – 새로운 관계 하늘 나라의 가족으로
공생애의 시작점에서 사생활의 종결이요, 가족들과의 사적인 관계의 종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적인 인간의 공로나 덕으로, 즉 사람의 착한 행실, 사람에 의해서 성취되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인류구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부탁한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인간적인 제안을 주님은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마리아의 부탁은 단순히 인간적인 도움을 주자는 제안이었고,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제안을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결국 그 제안을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읽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사적인 관계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인류구원의 차원은 사적인 인간의 관계나 인간의 지혜나 선행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머니>에서 <여자여>로 바뀝니다. “여사님”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사적인 호칭에서 공적인 호칭으로 바뀝니다. 어머니를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사역의 시작이 이제는 공적으로 이뤄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계로, 인간의 힘으로, 구원하실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히 이제는 사적인 관계에서 가장 가까웠던 어머니가, 이제는 신적인 관계로 가장 가깝고 절대적인 관계로의 전환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엄청난 전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주님은 사적인 사사로운 관계에서 구원주로서 공적인 관계로의 전환점에서 이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한 사실은 “어머니”라는 혈연관계를 앞세우지 않고, 뭔가 공적인 관계의 차원으로 말씀하시는 일종의 커다란 전환기의 호칭 변화라는 것입니다.
2.2. 율법과 전통의 결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비유될 포도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6-7)
새로운 출발점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결례의 물”에서 포도주로 비유되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실 정결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모자라게 된 것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대의 근동(近東) 지방의 사람들, 특히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혼인 잔치의 포도주는 대단히 중요한 음료입니다. 그 포도주를 충분히 공급하지 않고 도중에 끊어버린다든지 하면 자칫 하객(賀客)들이 무시당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생활에서 이렇게 무시당하는 것은 매우 큰 문제가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 혼인집의 주인인 신랑은 아주 당혹하게 됐을 것입니다. 생가보다 많은 손님으로 인하여 포도주가 모자라게 됐을 것입니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어머니가 “저희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것은 흔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잔치를 돌보아 줄 정도로 친분 관계가 있는 이 집에 갑자기 이런 당혹스러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니 어쩌면 좋을까”라고 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는 평소에 집안일을 늘 의논하던 큰아드님께 그 사정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주고받을 수 있는 일들 중에 당황스러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 것이라는 어떤 기적을 미리 기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물은 일반적인 물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결례의 물입니다. 손과 그릇을 씻는 결례의 물통이 돌 항아리였습니다. 특히 혼인잔치에 중대한 물입니다. 유대교의 전통과 가르침에서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물입니다. 즉 율법의 결례(정결의식)에 사용되는 물이 이제는 종결을 의미합니다. 물은 구속자의 보혈로 종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다른 어떤 기적들과 비교하여 낮은 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기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적인 생애에서 공적인 생애로의 전환점을 보여주시는 매우 중대한 기적인 것입니다.
3. 혼인잔치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로의 목표지점을 제시하심
❸셋째, 가난 혼인잔치에서 먼 훗날 성취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베푸실 혼인잔치”를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아로서 능력을 나타내는 이 처음의 기적이 물질적인 현상이나 결과로 보아서는 굉장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도 아니고, 한 편 손이 마른 완전한 불구자를 낫게 한 것도 아니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도 아닙니다. 혼인집에 가셨다가 그 집에 떨어진 포도주를 채워 주신 것뿐입니다.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실 때 죽은 사람을 살렸다든지, 불구자를 완전히 고쳤다든지 한다면 몰라도 혼인집에 갔다가 포도주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왜 맨 처음에 그런 정도의 일을 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에 대해서 배워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수준의 기적을 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기적은 그것 자체의 물질적인 혹은 물리적인 결과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셨지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많이 살려내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몇 되지 않습니다. 나사로라든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하는 그런 수로 셀 수 있는 정도에 그칩니다. 같은 시대에 살던 세계의 다른 인류에게도 그런 병과 고통과 어려움이 없으라는 법이 없지만 예수님의 기적이 하나도 거기에까지 미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후대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이 그 양으로나 그것이 주는 물질적인 효과적인 점에서 볼 때에도, 오늘날 대규모의 병원을 설치해서 많은 병자들을 수용하여 고치는 그것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어느 한 지방에서 부분적으로 소소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 기적이 단지 어떤 물질적인 효과만을 노리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은 그 계시하는 바가 더 중요함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 기적의 효과가 필요했느냐? 사람들에게 주께서 가르치는 바와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도록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즉 무엇인가를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누구에게 무슨 계시를 주었느냐 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고작 아주 곤란스러운 사정을 면해 주고 큰 기쁨을 주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대로 넘어가지 아나하고 한마디를 하고 넘어갔습니다. 영광과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처음으로 행한 이 기적은 ❶첫째,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었고 ❷둘째는, 그로 말미암아 주께서 지금 갓 얻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미 예수님을 어느 정도 믿는다고 고백하고 따라오기는 했겠지만 주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확고하게 해 줘서 그들이 "이제는 확실히 믿었다"고 하게 하시기 위해 이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주를 만든 이 기적을 행한 사실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를 가져왔으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했느냐 하면, 그 혼인 잔치에 왔던 사람들, 특히 신랑까지라도 그 일에 대해서 깊이 감명을 받고 '이게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하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한 그것입니다.
물론 이 제자들은 그 당시 그를 메시야로 믿고 그 후 그의 행하시는 일을 반대함이 없이 깨닫고 알아야 하겠지만, 그들은 그를 단지 메시야로만 믿는 그 정도에 주저 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데는 그들이 이르러야 할 최소한도의 중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그 첫 단계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믿어야하고 둘째 단계는, 그를 만인의 구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분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주님의 손에 맡겨야
이 기적은 그때의 형편과 필요에 따라서 행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소경이면, 그는 눈을 뜨는 것이 필요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또 반신불수 된 자에게는 몸이 건강하게 되어야 할 테니까 온 몸이성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때그때의 수요 혹은 간절한 요구(need), 절실한 필요에 따라서 주님이 채워 주셨습니다. 여기서는 포도주가 필요했으니까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러한 자그마한 문제라도 예수님께서는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 맡기는 일은 어렵고 고통스럽고 극한적인 일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당혹한 일이나, 곤혹된 일, 어려운 일, 곧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은혜를 어떻게 주시든지 먼저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종류의 일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손에서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 같은 것은 간단한 문제니까 예수님이 그 신적 능력을 그런 데까지 베푸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하실 일과 하시지 아니해야 할 일을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주께 맡겼을 때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십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68:19)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대소의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맡기고 나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명령해서 당신의 보장과 당신의 규례 아래서 나를 그 하인으로, 그 부리는 종으로, 그릇으로 쓰셔서 그 일을 이루어 나아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