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장13-22절 주전20240714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13-22)
1. 새로운 거주지 가버나움
1.1. 가버나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해했으면서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직후에 어머니와 예수님의 형제들은 함께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마4:13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사시니”) 이후로 그곳 가버나움은 주님이 거주하시는 “본 동네”가 되었습니다. 이미 결혼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자매들”은 나사렛에 남아 있었지만, 가족들은 나사렛을 떠난 것입니다. 거주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긴 것은 예수님에 대한 육신의 가족들이 충분히 이해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대답을 듣고 하인들에게 마리아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태도에서 받는 느낌입니다.
유대교의 메시아였다면 그런 비천한 가족을 부끄러워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가족들의 무지를 힘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 측면에서 모든 일에 그들에게 부드럽게 접근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역과 사명에 관해서 가족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신 과정과 함께 거주하신 일에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매우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불신자인 가족들과 살아가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양면을 소유하고 있어야 할 중대한 것입니다.
1.2. 폐허가 된 고대의 가버나움
고대의 가버나움(Capernaum)이 “위로의 마음”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는 이곳이 폐허가 되어 정확한 흔적을 찾을 정도랍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역사와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서에서 가버나움에 대해 듣게 됩니다. 어떤 유대교 랍비들은 그곳을 이단과 연결시켜 악의에 찬 언급과 야비한 발언도 기록에 있습니다. 기독교를 유대교의 이단으로 규정하는 데에 노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은 많은 기적이 행해진 예수님의 고향으로 지적하는 데에는 모두가 일치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보자면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함께 공존했던 삼국시대(B.C57-A.D660)의 무렵의 일입니다.)
아무튼 가버나움의 회당이 로마의 백부장에 의해서 지어진 것으로 볼 때 새롭게 형성된 고을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의 파견부대가 주둔해 있었습니다. 중요한 세관 중하나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눈을 만년설로 덮여있는 헤르몬산의 전경이 보이는 곳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불어오는 부드럽고 바람, 흐르는 시냇물, 수원지가 가까이 있어 얻어지는 풍요로움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버나움은 가장 살기 좋은 곳 중에서 하나입니다.
여기 해변 가까이에 회당이 하나 서 있고, 북쪽 완만한 경사면 위로 마을이 뻗어있고, 그 동쪽과 남쪽은 호수입니다. 거기에는 사랑스럽고 작은 만들이 연이어 있어서, 6마일 이내에 그런 만(灣)을 17개 이상 셀 수 있습니다. 그 만들 중 하나에 가버나움이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지금 집들은 모두 사라졌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습니다. 선한 백부장의 집, 세리 마태의 집, 시몬 베드로의 집, 그리고 주님과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이 한동안 기거했던 그 집,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쳤던 그 흰색 회당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폐허의 덩어리만 남은 것입니다.
2. 유월절을 즈음하여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으로”
2.1. (공생애)첫 번째 유월절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 했을 때 주된 거처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께서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셨다.”(12) 왜냐하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에서의 우리의 계산이 정확하고, 세례 요한이 주후 26년에 선포를 시작했다면, 예수께서는 그에 이어진 초겨울에 세례를 받으신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유월절은 같은 해 봄(4월경)에 해당됩니다. 이 유월절을 위한 준비는 물론 한 달 전부터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하려는 각 가정의 준비는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가 그 일을 준비합니다.
그 절기 한 달 전 이달(Adar)월 15일에 다리와 도로가 보수되고, 순레자들이 실수로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들은 하얗게 칠해집니다. 그리고 이 절기를 양과 소의 십일조를 드리는 절기로 정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유월절 2주 전에 십일조로 바칠 것들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한편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해” 절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올라(요11:55)가는 날로 정했습니다. 즉 레위기 율법에 따라 모든 부정에 대한 결례를 수행합니다.
2.2. "환전상들"(술하님 Shuchanm)
그러나 그 땅에서 각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은 "환전상들"(술하님 Shuchanm)인데, 이들은 유월절 한 달 전인 아달월 15일-25일에 모든 촌과 마을에서 그들 "환전상들 상"을 벌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허가를 얻어서 행합니다. 이는 모든 유대인과 개종자는 여인과 노예, 그리고 소수 민족을 제외하고는 “거룩한" 기준으로 반 세겔의 연중 성전세를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한 갈릴리 세겔(2데나리온), 혹은 오늘날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실링 20펜스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많은 제사장이 자신들은 이 세금을 면제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성전세는 정확하게 (성전)반 세겔로 지불되어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은전과 동전, 페르시아, 수리아, 애굽,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화폐들이 그 나라에서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환전상"들이 무슨 일을 했을지는 쉽게 짐작됩니다. 순례자들이 처음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시작할 때가 되면, 촌의 상은 철거되고, 대신 환전상들은 성전 경내에 들어와서 상을 다시 열었습니다. 성전세를 내지 않는 사람은 그들의 물건을 당했습니다.
“환전상"은 법적으로 정해진 수수료를 받았는데, 하나는 세금으로, 다른 하나는 환전 수수료로 내야했다. 막대한 수수료 이익이 발생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온 수많은 유대인 역시 동일한 상태로 성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외국 거주 유대인 중 많은 사람이 그들의 외국 돈을 바꿨을 것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수수료가 부과되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왜냐하면 결례를 위해 성전 경내에서 구매해야 했는데, 상인들과 논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정해진 환전상들로부터 공인된 돈을 준비하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우리는 동방의 환전상의 상 주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마음에 그려볼 수 있다. 동전들의 무게를 달고, 부족분을 깎아 내며, 따지고, 다투고, 흥정하는 모습을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었다는 우리 주님의 비난이 분명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2.3. 성전에서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
성전 관리인에게 소제와 전제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후에 준비하는 것은 매우 편리한 일이다. 가격은 매달 요금표에 의해서 결정되고, 그 금액을 지불함으로 예물 드리는 사람은 넉 장의 영수증 부표 중 하나를 받았다. 거기에는 어떤 절차에 그것이 필요한지 기재 되었고, 관리에게 제출함으로 그의 제사 절차가 완료되었다. 이 일은 책임진 제사장이 매일 저녁 장부를 정리하고, 성전 곳간에 상당한 이익을 남겼습니다.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드릴 희생 제물을 직접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감람산에는 제물로 쓸 비둘기와 다른 물건을 파는 상점이 4군데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동물을 가져 오면 임명된 사람들에 의해서 그 동물들이 레위기 율법에 부합하는지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구매자의 무지나 검사관의 탐욕 때문에 언제나 논쟁이 났습니다. 검사관은 그 일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기울였는지... 어떤 교사는 농부와 함께 18개월을 보냈다고 한다. 제물로 쓸 보통 동물을 검사하는데 유사한 검사료가 부과되고, 검사를 마치고 수수료가 이미 지불된 동물을 구매할 수 있는 성전 경내의 성전시장을 이용하면 모든 고충과 고생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런 매매 행위에 의해 성전이 철저히 세속화되고 또 어떤 부끄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는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직에 있는 사람은 그런 일에서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물론 “반열”에 따라 성전에서 봉사한 일반 제사장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제사장직에 봉사하는 관리, 제사장직의 상임 지도자, 특히 대제사장의 가문이 그들이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사실은 그 유월절에 있던 그리스도의 성전 방문과 관련되어서 특별히 살펴볼 것을 제공한다.
2.4. 군중들의 반감과 주님의 심판
우리는 예수님에 의한 성전 청결과 관련해서 그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적과 관련해서 상당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입장은 이렇다. 이 잡화전에서 벌어진 매매의 불의함과 그 소유자들의 탐욕 때문에 "성전 시장"은 그 당시 군중에게 지극한 불만의 대상이었다. 이 사실로 인하여 예루살렘 멸망 3년 전에 군중의 분노가 안나스 가문의 잡화전들을 쓸어 버렸다. 기록된 대로 그들 거래의 특징인 악한 탐욕 때문이었다. 주님의 심판과 같은 선언, 성전 시장을 “강도의 굴혈”로 표현한 데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악명 높은 대제사장 가문의 탐욕과 부패에 대해서 요세푸스와 랍비들이 전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안나스의 아들, 안나스를, “막대한 돈을 축적한 자”, 즉 매우 부자로, 그리고 공공연히 폭력으로 다른 제사장들의 공적 수입을 약탈해 간 자로 묘사한다. 탈무드 또한 대제사장 가문(안나스 가문)에게 선포한 저주를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그들 자신은 대제사장이고, 그 아들들은 금전 출납관이고, 그 사위들은 보조 금전 출납관이며, 그 하인들은 몽둥이로 백성을 때리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전언은 예수께서 채찍을 만들어 “백성을 몽둥이로 때리는” 하인들을 쫓아내며, 그들의 거룩하지 못한 매매 행위를 둘러엎은 행동에서 의미심장한 면을 볼 수 있다. 랍비 문헌들에 근거해 그들의 사치, 낭비, 탐식, 그리고 예외 없는 방탕에 대한 역겨운 이야기를 첨가해 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탈무드의 상징적 표현에서, 성전이 그들에게 “가라, 너희 엘리의 아들들이여, 너희 여호와의 전을 더럽히는 자들이여!"라고 소리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런 고통스러운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한 일과 그의 행동을 반대한 자들이 누구였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안나스 가문의 성전 잡화전들, 재산, 주 수입원 중의 하나,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대상이었다. 당시에 산헤드린이 모이던 그 잡화전터에 부속된 은밀한 장소에서 비록 실제로 선언되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마지막 정죄가 계획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잡화전을 관리하던 성전 관리들이 왜 그렇게 성전을 청결케 하는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도의 행동밖에 취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 전체 매매 행위가 대중의 미움을 샀고, 그들의 양심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행동과 그들의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 주는 의미를 더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백성이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은 사실, 심지어 제사장들의 저항도 직접적이지 못하고, 도리어 애매한 질문의 형태를 띤 사실에서 무엇인가 느낄 수 있다.
성전 청결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공적인 첫 행동이 성전 청결이었습니다. 주석가들은 이 사건(요2:13-22)과 그의 사역 마지막에 성전을 청결케 한 사건(마21:12-13)의 차이를 충분히 지적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해서 누구나 그 차이를 주목할 수 있다. 성전에서 그의 공적 사역의 시작과 끝에서 벌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사역은 “예기치 못한 일”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일"도 아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인간적인 계산으로 계산된) 행동과 책략을 찾는 것은 신성 모독적인 일이다. 그랬다면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결코 “예기치 않았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 처음 나타나서(12세 당시), 자신이 성부의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던 때가 12세였다. 그때 접어 두었던 그 줄거리를, 지금 다시 계속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그의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의 사명을 아는 모든 사람은 이 사악한 매매 행위에 의해 “강도의 굴혈"이 된 자신의 아버지 집에 대한 신성 모독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그의 메시아적 사역은 가장 잘 어울리며 필연적인 일이다.
그리고 거기 있던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기들이 새로 발견한 메시아를 선포한 제자들의 열정이 절대적인 침묵으로 일관되었을 수는 없다. 성전에 있던 많은 갈릴리 순례자들은 그 소식을 퍼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 처음 그 거룩한 구역에 들어섰을 때, 그 소식은 성전 경내에서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가 행하는 것을 주목했다. 그리고 실망하지 않았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할 사람에 관한 예언(말3:1-3)을 성취시키신 것이며. 이처럼 그의 사역을 착수했던 것이다.
성전 정문으로 들어가 이방인의 뜰을 밟자마자, 그는 더럽히던 것들을 쫓아내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양과 소를 쫓아낼 때 누구도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환전상의 돈을 쏟고, 그들의 상을 뒤엎을 때 한마디 말도 없었고, 누구도 손을 들지 못했다. 그의 임재는 그들을 두렵게 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그들의 양심까지 일깨웠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난이 얼마나 참된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의 뒤에는 놀란 군중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그 밉상스럽고 부패하고 탐욕스런 제사장들의 극악한 행위에서 성전을 정결케 하는 용감하고 당당하며 메시아적인 행동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저항으로, 덜 감정적인 사람들도 그리스도에게 존경과 인정과 칭찬을 돌리게 했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그의 안전을 확보해 준 행동이었다. 이렇게 정결케 하는 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한 이래 그는 항상 개인과 교회에 대하여 이 일을 하고 있다.
도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나타난 표적
"유대인들” (백성의 지배자, 특히 성전 관리)이 용기를 내서 함께 왔을 때에도, 그들은 감히 그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가까운 안토니오 성채에 진주한 로마 파견대가 처음 발생한 이 소란을 예리한 눈으로 계속 감시하고 있는 때에,비록 성전 경내에서는 조용해야 한다는 정책을 세워 놓지는 않았더라도, 그 군중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감하 예수께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나쁘다거나 합당하지 않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표적으로 "입증하라!
성전 관리들은 지극히 교묘하게 군중에게 호소하면서 그들은 그 권위를 해하는 자의 정당성을 입증할 “표적”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도전의 질문은 두 가지를 나타냈다. 유대교 권세 자들과 예수님의 본질적인 대립, 예수님과 백성의 지배자 사이에서 앞으로 벌어질 투쟁이 수행될 방식이다. 예수님의 그 첫 번째 행동은 그들의 상호 입장을 결정했다. 그 첫 번째 갈등과 함께, 그 속에 이미 결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배자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은 평생의 대립으로 전개되었으며, 예수께 대한 그들의 첫 조치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로 보내는 종말로 이어졌다. 그때 이미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알았고 미리 내다보았다. 그의 대답이 그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바로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그 지성이 어두워지고, 그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모든 가르침은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야 비로소 명백해지는 비유적 언어였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그들의 생각과 행위가 악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음란한 세대가 그때로부터 늘 구하는 표적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주는 "표적"은 늘 한 가지였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도전에 표적의 도전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까지 했던 표적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마지막 재판에서 그들이 잘못된 비난을 하는 근거가 된 그 표적은 사실상 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다시 말해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버린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또 지금도 주고계시는 유일한 표적이다. 그들이 힘이 미치는 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파멸시키며, 그의 말을 거짓으로 돌리고, 기독교를 박해하고 없애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승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될 것이다. 그의 부활하신 날 그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과 또한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무너뜨린 성전을 일으켜 세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대적에게 주는 표적이요, 유일한 “표적”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이 위대한 표적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표적이다. 이것으로 충분한 증거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적적인 성격 때문에 자연 능력에 의해서는 도저히 인식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물로만 이해했지만 "그 성전"의 영적 성격과 건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생각도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세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이후의 모든 세대도, 그들이 이해한다면 이것은 역시 “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단지 그들은 보고, 놀라고, 망하게 될 유일한 표적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