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곁에 앉으신 메시아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1.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던 예수님
오늘날도 명절이 되면 도시와 지방을 오가는 차량으로 도로가 매우 번잡합니다. 유대나라에서 명절은 유대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순례자”를 자청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찾아갈 때 사마리아를 지나서 가야 할 때에는 언제나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 중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다가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적대감으로 가득 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1.1.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에데이
요단강 동편, 이방 나라를 지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북쪽 갈릴리로 갈 때마다 지름길로 가려면 반드시 사마리아를 지나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북쪽 갈릴리로 가가시려고 할 때, 지리적 여건상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종 유대인 여행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단히 혐오해서 동쪽 이방 나라 지역인 요르단을 거쳐서 좀 더 긴 노선을 따라야 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에데이)라고 명확히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이 기록한 의도는 단지 지리적으로 꼭 그 길로 가야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동쪽 요르단으로도 얼마든지 통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그렇게 꼭 "해야 했다."는 말은, 뭔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 있어서 사마리아로 통행했어야 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작정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하셔야만 했던” 일들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여러 번 암시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스스로 고난을 받아야 하시겠다는 말씀이나, 그리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하겠다는 말씀, 제자들을 떠나야 할 때를 자주 말씀하신 데서 “하셔야만 했던” 일들이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자주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맥락으로 오늘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다는 것, 즉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과 하나님의 집을 향한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열정이 성전 정화 사건에서 보여주셨듯이 죄로 죽은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열정에 따라 사마리아로 가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적대적일지라도 주님의 영혼 구원의 열정을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에게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를 기록할 즈음에는 요한 사도 역시 성령에 충만한 가운데 정도의 열정을 불태울 때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메시아의 열정에 부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1.2. 반역의 중심에 않으신 예수님
예수님 당시에는 사마리아가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와 통합 되어 로마 총독의 관할 아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지역은 역사와 종교적인 면에서 확실하게 경계선이 지어져 있습니다. 오랜 역사와 유적들이 말해줍니다. 구약의 오므리 왕은 북-왕국의 새로운 수도를 “사마리아”로 지명했습니다.(왕상16:24) 그 후로 이 지역을 사마리아로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북-왕국 전체가 사마리아로 불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옛 역사에 의하면, 앗수르 사람들은 주전 722-721년에 사마리아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모든 부유한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다양한 이방인들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켜서 정착시켰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민족 말살정책입니다. 타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철저히 망가지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필연적으로 따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방인들이 정착하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통혼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갖고 있던 종교를 사마리아에서 고수하였습니다.(왕하17-18장) 그래서 북방의 앗수르-제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다시 사마리아 지역으로 귀국해서 돌아 온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서로 크게 충돌합니다.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이미 정치적 종교적 반역자로 몰리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혈통까지도 변질된 사람으로 여긴 것입니다. 사실상 이방인보다 더 역겹게 생각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느13장)
시대가 흐르면서도 더욱 반목이 극심해졌습니다. 드디어 주전 400년경에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거부하고 대항했습니다.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의 성전에 대항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종교적이며 혈통적으로도 큰 적개심에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주후 1세기에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신앙을 모색하면서 모세오경을 변질시켜서 유대의 정통 신앙에 대항한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유산이었던 야곱의 유산과 요셉의 무덤 등등, 그런 것들과 함께 ‘그리심 산’을 그들의 예배중심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여기 그 반역의 중심지에 예수께서 앉아계신 것입니다. 끝없는 반목과 극도의 적대감으로 고통스러운 시대를 지나온 것입니다.
그 중심지에 우리 주님이 앉아계십니다. 여기에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류 역사상 서로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항상 죽이고 죽임을 당하며 서로를 대적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요한 사도의 눈에 이 장면은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식 둘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은 일화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 깊은 인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 사랑의 사도가 당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시기를 지날 때,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반목의 현장, 그 반역의 감정으로 충만했을, 반역을 꽤하던 그 중심지에 앉으셨습니다.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사마리아, 이 반역의 소굴에 앉으신 것입니다. 본문이 그려준 가장 놀라운 그림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반역의 소굴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같은 형제이며 같은 민족끼리 반목하며 적대감으로 가득한 곳을 찾으셔서 하신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종교적 무지와 추잡한 민간신앙에 만족하면서 온갖 정욕의 노예로 살아가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열정을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특히 요한 사도는 복음서를 쓸 때,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대비시켜 증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매우 박식했고 권력이 있었으며, 존경받았고 정통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학적인 훈련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자는 못 배웠고 영향력도 없었으며, 멸시를 받았고, 단지 어두운 민간 신앙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남자였고 유대인이었으며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지는 여자였고 사마리아인이며, 도덕적으로도 파탄이 난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하지만 둘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점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1.3.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민간신앙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떠나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를 찾아가 그 중심부에 들어가셔서 구원의 복음, 유일한 영생의 길을 계시하셔야 했습니다. 그 절대-필요성을 요한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모든 영역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려진 채로 있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상실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위정자들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대통령과 관련되어 있는 온갖 더러운 잡신들과 무지한 민간신앙에 정신을 빼앗겼다는 소문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권 당시 백성의 분노가 한계점에 닿았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이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저급한 미신과 저급한 민간신앙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문에 대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일체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일부 참된 복음진리를 가슴에 품은 일부 이름 없고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이런 상황을 아파하고 고뇌할 뿐입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일체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유대역사에 전해져 오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커넥션을 언급합니다. 모종의 더러운 정치적 연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 세례 요한을 죽이는 데 그들이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세력으로 자리를 잡고, 그리스도의 복음진리 위에 서서 말하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단지 이름 없는 갈릴리의 사람들과 순수한 신앙의 사람들만이 그 당시를 고뇌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니고데모라는 지도자 중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진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로 살아가는 성도가 목소리를 내어도 듣지 않습니다. 진리의 사람들은 오늘날도 가슴 아파 하면서 울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몇 되지 않는 참 신앙의 사람일 것입니다.
일종의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아파하며 고뇌의 기도가 여러분의 가슴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오늘날 이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되어야 할 시대입니다!
2. 하나님의 선물을 기대하라
2.1. 예수님을 알지 못한 여인의 상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절)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그분이 엄격한 유대인들과 같이 편견에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 장면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생수"를 주겠다고 제안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그분을 볼 때, 매우 피곤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아직은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으셨기 때문에 알지 못했습니다. 요1:14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한 분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녀는 "훨씬 더 나은 음료"를 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때에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때로는 표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멈추게 하십니다. 하지만 가장 일상적인 상황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아직은 그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대화 속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은혜와 진리로"(요1:14) 충만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광경을 이 본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2.2.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여 주심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아주 비참한 사람도 있고, 사회적으로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곧바로 의탁하지 않고,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럴 때 두려워서 주님이 나를 떠나 달라는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깊은 회개와 슬픔을 겪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했다는 표현보다는 겪는다는 표현이 가까울 정도입니다. 회개를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하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회개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을 가지고 뛰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해주셔야 한다는 절대 필요성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회개의 역사에 따라 곧바로 자신을 의지할 대상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붙잡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들을 거듭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그 거듭남이 이제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죄인에게 일어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장면입니다. 그러기 전까지 이 여인의 눈에는 지치고 배고프며 목말라 하시는 유대인의 한 선생으로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깨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서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적용되는 그리스도의 서사가 없이는, 결코 은혜와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스스로 다 안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사마리아의 무지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미 들은 대로 예수님의 모든 서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단지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는 관점에 머물러 있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 한 구석에 "들어도 뻔하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고집과 편견으로 사로잡히면 가장 고집스러운 유대인과 무지한 저 사마리아 여인과 상태를 한 군데 묶어둔 상태라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에게 찾아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비춰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3. 선물을 기대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그녀가 알지 못한 “생수”는 무엇일까? 환경적으로 생수를 매우 소중한 물로 여기는 배경에서 삽니다. 생수를 주신다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주신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가 변질된 본질은 무엇입니까? "선물"을 "노력의 대가"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구원이 노력의 대가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가장 큰 변질은 이런 면에서의 변질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생수를 주신다는 말씀은 선물을 주신다는 말씀인데, 유대인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선물은 유일하게 "토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토라를 따라 노력으로 댓가를 받는다는 종교적인 변질이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님" 당신 자신을 점점 계시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영생"을 가리킵니다. 오직 예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영생"을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유대적인 사고체계에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은 토라"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상의 선물이 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2.4. 유대적인 사고체계
오늘날 우리들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태에 묶여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 만족하는 데는 일종의 유대적인 사고체계와 같은 그런 사고체계에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더 이상 하나님의 선물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에게는 더 이상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오만한 생각입니다. 이것이 깨어져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더 풍성한 은혜와 진리로 우리를 채워 가실 수 있으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풍성한 선물을 알고 기대해야 합니다. 갈망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만족"이라는 질병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자기만족"을 채워가야 한다는 데 사로잡혀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더 이상 은혜와 진리가 필요하지 않거나, 충분하다는 식의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자기만족”이라는 질병에 걸여 있습니다. 마귀는 이런 질병으로 쓰러져 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제 이 질병을 치유 받읍시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속임수의 정체를 밝혀내고, 하나님의 선물이 지금도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내 영혼에 채우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갈망합시다. 그리하여 전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교제를 상기합시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합시다. 간구합시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가면서 갈망하듯이 말입니다. 드디어 그 야곱의 샘 곁에 앉으신 분이 기다렸던 메시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요4:25-26절입니다.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결론과 적용
선지자들은 그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흐르게 될 때를 바라보았습니다.(슥14:8; 겔 47:9) 이 비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그의 은혜, 하나님을 이는 지식, 영생,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물" 또는 "생수”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이 모든 주제들을 이 복음서에 담아냈습니다.(3:5; 4:10-15)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온 떡”(6:35)이라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생수"라고 말씀으로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생수를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오직 메시아이신 세상의 구주, 예수께서만이 줄 수 있는 "영생"입니다. 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마름을 영원히 없애 줄 "영생"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이란 속임수로 삽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편견, 즉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실감 나에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어두움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제대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생명까지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능력의 손에 붙잡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모든 것을 권한으로 주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어두움이 걷혀지길 바라고,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그리스도 안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결단하십시오. 그걸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버릴 것을 결단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해결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