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5장1-18절 주전20240818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장1-18절)
서론 : 왜 예수님은 베데스다에 찾아가셨을까?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인을 치유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달리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병인의 믿음이나 감사, 찬양한다는 내용이 증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듯이 말합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이 사건을 왜 기록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5-7장으로 이러지는 데서 밝혀집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혀주는, 더욱 강렬한 계시의 출발점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기계시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반응이 더욱 절망적으로 치닫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단순한 유보와 주저’에서 이제부터는 ‘직설적인 반대’와 ‘공식적인 대적’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도 메시아로서 그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무엇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❶저 무지한 사람들의 민간신앙에 얽매인 어두움 가운데로 오셨다는 것이고 ❷종교적 인간들의 대표적인 사람들, 즉 하나님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성전 중심부에서 오만함으로 가득한 채 사랑가는 사람들 속으로 메시아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차원으로 볼 때 본문은 “메시아의 위대한 서사(敍事)”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베데스다의 병인에게 찾아오신 메시아
1.1. 베데스다를 찾으신 예수님
예루살렘 성전 북쪽 양문 곁 가까운 곳에 두 개의 연못이 있습니다. 북쪽에서 끌어온 수로를 따라 베데스다 연못을 만든 것입니다. 이 연못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그 제단의 제물로 가져온 양을 깨끗이 씻어주는 곳입니다. 두 개의 연못으로 이뤄진 다른 한 연못에는 수많은 병인들이 찾아드는 곳이 되었습니다. 민간신앙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이 수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순간에 요동치면 서로 먼저 달려들어 질병을 낫고자 했습니다. 당시 이런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유대교는 강력하게 단속하지 않았던 시기였답니다. 아무튼 병인들은 베데스다에 모여들고, 유대의 절기가 되면 제물로 가져온 양들을 씻어서 성전으로 가려는 사람들과 병인들로, 그 일대는 매우 번잡하고 깨끗한 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류층 사람들은 이곳을 우회해서 통행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곳에 오셨습니다. 누가하나 찾는 사람도 없던, 그 복잡하고 지저분한 베데스다를 찾아 오셔서 수많은 병인들을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1.2. 예수님은 왜 이 누추한 곳을 찾으셨을까?
우리는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기다리는 “많은 병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신 예수님의 모습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광경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속에 일으켰을 느낌이 무엇이었을지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실 당신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예수께 그 어떤 요청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그 다섯 행각 안에 들어가셨을까? (하나의 행각은 두 개의 연못을 분리해 놓은 듯 하고, 다른 행각은 그늘을 제공하고 때로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곳)
분명한 사실은 (요한사도에 의하면)단순한 호기심으로 거기에 오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의 저 우쭐대는 사람들, 그 화려한 권력과 숨 막히는 교만함과 그 거친 품행으로 서로 기선을 잡으려는 종교지도자들로 가득한 곳, 그런 곳을 대신해서 주님이 먼저 찾으신 곳은 베데스다였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거짓된 민간신앙의 대상,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향해 애처롭게 도움을 청하며 애걸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 무지한 군중 속으로 메시아가 들어오셨습니다. 사실 베데스다와 같은 곳은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참된 활동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분은 그런 곳으로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원하셨습니다. 불쌍한 병인들, 민간신앙의 무지로 가득 찬 어두움, 그런 속으로 들어가셔서 언제나 당신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진리의 빛이신 메시아는 언제나 어두움을 뚫고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이 요한 사도의 의도였다고 봅니다.
1.3. 왜 그 병인을 치유하신 의도는 무엇일까?
거기 38년 된 병인이 스스로는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로 누워 있습니다. 당시 성인 남성이 40대를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수명이 매우 짧은 시대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병인은 일생동안을 절망적인 인생을 살았을 뿐입니다. 이 광경이 우리 모든 인생들을 대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인생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중, 누가 이 병인보다 복된 삶을 살았다고 자랑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최후에는 비참하게 죽어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광경은 우리 인생의 비참함을 대변하기에 충분합니다.
왜 예수님은 왜 이 병인을 치유하셨을까?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우리는 여기서 “이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기적, 그리고 후에 그리스도께서 유대의 선생들에게 설교하신 내용을 생각하면, 거기서 깊은 내적인 연결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❶듣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기어코 제시하신 그분의 깊은 슬픔과 ❷범접할 수 없는 신적 위엄(威嚴)이 혼재 예수님의 설교는 안식일 논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그 위태로운 순간순간마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일한 생명의 공급자이심을 공개적으로 (유대인들에게)처음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이 요한 사도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베데스다의 치유와 설교 사이에서 깊은 내적 연결을 인식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베데스다로 가서 그의 능력으로 치료를 행하셨을까? 그 의도를 통찰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설교의 외적 순서와 연결을 뒤집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셔서 그곳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사람들과 접촉하셨습니다. 그 때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셨다는 것입니다. (어는 배우가 “에리디 액션”하는 순간 엄청난 외로운과 고독이 찾아든다고...)주님께서 이 결정적인 순간에 엄청난 외로움과 고독함을 견디시면서 감당하셨을 것입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을 주시는 유일무이한 분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순간 그런 결정을 내리셔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데스다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병인을 완전하게 치유하셨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음성과 완전한 능력으로 고치실 천상의 의사이신 메시아께서 병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병자는 예수의 물음에 적절하고 합당한 대답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별로 지각이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처지만을 한탄하고 불평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뻔한 질문을 왜 하느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물론 '퀴리에'("주여")는 단순한 존칭의 의미뿐입니다.(영어의 "Sir"에 해당하는 단순한 경칭) 이 병인에게서는 어떤 주도적 태도, 지각과 기지, 열렬한 믿음이나 문제의식을 느끼는 점에서 이 “병자”는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특히 이 병인은 예수님에 대해 알지도 못했습니다.(13절) 그런 다음 성전 지역에서 예수님을 우연히 만나 자신을 치우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예수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실수가 예수 때문이라는 식으로 (찾아가서)고자질 하듯이 말합니다.(15) 어디에도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오히려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에 바쁘고, 예수님이 안식일 논쟁으로 휘말려 들 상황임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 병인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불쌍한 병인을 치유하시고, 곧바로 휘말려 들 안식의 논쟁으로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주님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일하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하는 사실을 선언하셨습니다. 메시아의 자기계시의 출발점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베데스다의 병인을 치유하신 이유입니다.
2. 어두움을 뚫고 찾아오신 메시아
2.1. 종교지도자들의 완고함
유대 지도자들, 그들은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자세히 분석하고 문자 그대로 생각하고 추론합니다. 온갖 금지명령의 울타리를 율법보다 더 세심하게 두르고, 그런 율법의 요구를 충실히 임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신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런 거짓된 신앙심으로 모든 종교적 의무를 수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기를 기만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데로 떨어진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종교심은 그들 자신을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거부하기까지 자행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유대인의 비극이요, 요한복음이 문제의 핵심으로 것입니다.
오직 성경의 문자만을 주시하고, 외형만을 붙잡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표적이나 역사의 모든 교훈은 그들의 오만한 마음에서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그 많은 기적들과 계시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성부 하나님의 증거가 있지 않았습니까? 외적인 형식만을 다루면서 깨닫지 못한 것은 성부 하나님의 명백한 증거들입니다. 성부의 직접적인 말씀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게서 들리는 목소리, 세례 요한에게서라도 들었어야 했을 목소리도, 모두 성부 하나님의 명백한 증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유대의 사람들은 무지와 완악함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드디어 메시아를 공개적으로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이 땅의 인생들이 성부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 거부하고, 어떻게 공개적으로 대적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실을 밝혀준 이야기가 베데스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보여준 그 병인과 유대 사람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을 본문이 여실히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2.2. 어두움 속으로 들어오신 메시아
유대의 사람들,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습니다. 표적과 계시의 말씀을 진심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복음서에 담은 것입니다. 베데스다의 수많은 병인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민간신앙의 어두운 미신에 매달려 병든 몸을 이끌고, 칠흑 같이 어두운 마음과 영혼의 상태로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향해 오직 육신만을 낫고자 하는 열망으로 찾고 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저 거룩한 성전에서는 오만한 유대의 선생들이 종교의 온갖 모양새를 갖추고, 자신들의 행위를 앞세워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거짓된 열정을 내세워 성부 하나님과 아들의 증거를 송두리 채 눈 감고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저 유대 선생들의 완고함은 자신들의 섬김과 율법에 열심을 다하여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는 것입니까? 그들은 언제나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으로부터 저 거룩한 성전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도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두움으로 가득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대변하는 장면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증거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어두움 가운데 사람들은 도대체 ‘진리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처럼 성부 하나님이 써 내려간 끈질긴 서사(敍事 사실 있는 그대로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토록 어두운 인간들의 무지와 편견, 그리고 그 오만함 속으로 메시아가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요한 사도는 이 신비한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66년부터 철저히 멸망으로 치달았습니다. 다가오는 멸망을 예감한 듯 사도는 이 모든 광경을 지나온 세월 속에서 직접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진실의 실마리를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대다수의 제자들과 함께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는 이 큰 그림으로 복음서의 그림을 먼저 드로잉(drawing)하고 그런 다음 구체적으로 색칠하여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서두에서 선언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요1:11-12절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메시아께서)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영원토록 울림이 말씀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두움 속으로 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역하고 듣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 땅의 무지와 완악함을 하늘과 온 세상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메시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인생들을 보십시오! 온갖 미신과 종교적인 열정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까?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기독교의 탈을 쓰고 거짓된 신앙의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는 오늘날의 인생들을 보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의 한낱 나라와 민족의 소유물 정도로 여기고, 정치가들의 조무래기들이 선동하는 이 현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아의 말씀을 자신들의 선전도구로 전락시킨 저 무리들을 보십시오! 더러운 광화문 광장과 욕망을 채우는 예배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담긴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를 멸시하고 대중들을 현혹하는 자들의 말로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성부 하나님께서 자비의 손길을 거두시면 이 땅은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로 치닫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운 마음으로 이 세대를 살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 희망의 빛을 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어두운 면만을 증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가장 멸시받던 사마리아에서 메시아의 놀라운 계시의 빛이 발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오셨다고 외칩니다. 그처럼 이 어두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골방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이름 없는 성도로서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길이 있습니다. 전인격으로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성자 하나님을 믿는 신뢰와 성령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리 수 있습니다. 이를 갈망하는 데서 우리는 희망의 불씨를 지핍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모두 주셨습니다.
우리처럼 무지하고 완악한 자들에게, 모든 악조건과 사단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신 메시아를 보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처지에 걸맞게, 우리의 눈높이로, 메시아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애를 우리를 위하여 모두 허비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소망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담겼습니다. 우리의 메시아이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사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는 만물을 다스리시는데 모든 존재와 모든 존재의 관계와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면서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선지자의 열정을 추억하십시오! 우리도 그 열정으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이 땅의 절망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영원히 시들지 않는 빛,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합시다. 일생동안 우리의 메시아를 추구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