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바른 기도를 꿈꾸다.
01. 기도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1. 기도 말고는 답이 없다!
시편을 연구하는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9·11사태가 터졌고 암울한 기운이 몇 주간이나 뉴욕을 짓눌렀다. 온 도시가 한꺼번에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우리 집에 드리운 그림자는 유난히 짙었다. 아내 캐시는 매일 밤마다 빠지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기도를 하자고 말했다. "우리 부부가 함께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눈앞에 닥친 일들을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해요." 성령님이 역사하셨을지 모른다. 아내와 나는 머릿속에 불이 반짝 켜지는 기분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말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고 또 해내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올바른 기도를 드리지 못했다는 자각이 깊어지는 가운데,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아내의 도전까지 받은 터라 새로운 길을 탐색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기도생활을 지금보다 더 높은 차원까지 끌어올리고 싶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적잖은 이들이 비슷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2. 제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
미국 남부 출신으로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스물한 살 젊은 나이로 아이오와 주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던 시절, 기도 생활의 깊이를 더하려고 애를 썼다. 1946년, 오코너는 손으로 기도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코너는 이를 두고 기도했다.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감정을 파악해서 토로하고 분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더없이 정직한 자세를 취했던 구약성경 시편 기자들의 그 옛길을 따라갔다. 오코너는 잘 살고 못 사는 건 사랑의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하는 데 달렸다는 점을 의식한다. 오코너로서는 기도로 끊임없이 영혼의 지향점을 조절하는 노력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오 하나님, 제발 내 생각을 투명하게 해 주세요.정결하게 씻어 주세요. 밑바닥으로 내려가 주님이 머무시는 곳을 깨닫게 도와주세요." 일지에서 오코너는 기도에 기반 한 글쓰기 훈련을 곰곰이 되짚는다. 오코너는 일지를 통해 “사춘기의 버릇과 정신적인 습관을 떨쳐 버리고 영적 삶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믿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건만, 그 사소한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
오코너는 기도란 그저 주관적인 세계를 혼자 뒤지고 다니는 탐사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기도는 또 다른 존재와 함께일 때만 가능하다. 그 존재는 하나님이시며 대단히 독특한 분이다. 그분께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그런 인격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주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새롭고도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다른 길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의 자기 인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오코너는 기도야말로 존재와 행위 전체를 아우르는 열쇠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꿰뚫어 알았다. (기도를 글로쓰면서 느꼈던 점) "의식은 도망자처럼 사방팔방 떠돌았습니다. 매번 이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심정을 적을 때는 사랑의 온기가 온몸을 감싸는 걸 감지했습니다." 어느 날 일기의 끄트머리에 오코너는 짤막한 외침을 적었다. "아무라도 좋으니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나요?"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3. 명상센터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
한 세대 전에 일어난 영성과 명상, 관상 등에 대한 관심이 아직까지도 서구 사회 전반에 걸쳐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비틀즈가 동양의 명상에 눈길을 주면서 순식간에 대중화의 물꼬가 트인 뒤로 제도 종교의 쇠락과 맞물려 꾸준히 확장세를 이어 가고 있다. 정기적인 예배의 통상적인 절차를 아는 이들은 갈수록 줄어들지만 영적인 갈망은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재한다. 해마다 수없이 많은 서구인들이 아시아에 있는 아쉬람(ashram, 힌두교도들의 수행하는 곳)을 비롯한 영성수련센터를 찾는다. 교회 역시 이와 흐름을 같이한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져 왔으며, 묵상이니 관상이니 하는 옛 전례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움직임이 일었다. 이제는 향심기도(centering prayer),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듣는 기도(listening prayer),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비롯해 온갖 '영성 훈련'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기관과 조직,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곳곳에 차고 넘친다. |
이러한 관심을 하나의 물줄기로 규정해선 안 된다. 오히려 여러 갈래의 흐름이 한 데 엉켜 위태롭게 일렁이며, 탐구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거센 물결 쪽에 더 가깝다. 관상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조에 관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 적잖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다른 이들의 기도 생활에도 두루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찾다 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이만저만 헷갈리고 어지러운 게 아니었다.
4.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길을 제대로 찾으려면 내 영성 신학의 뿌리를 살펴야 했다. 버지니아 주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 이후 자리를 옮기면서도 내내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를 가지고 말씀을 전했다. 로마서 8장 중간쯤, 바울은 이렇게 적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5-16)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중해 준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로 믿고, 다가가 부르짖게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영과 나란히 동행하면서 더 많은 증거들을 더하여 보여 주신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목사의 메시지를 글로 읽으면서 이 본문에 사로잡혔다. 바울은 하나님의 실재를 깊이 맛보는 경험에 관해 쓰고 있다는 게 목사의 주장이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확고한 사랑을 이처럼 명료하게 확인한다는 것은 '비할 데 없이 신비로운'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 말씀은 어느 신약학자의 말처럼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신앙 체험'을 설명하는 것이다. 토머스 슈라이너(Thomas Schreiner)는 한 발 더 나아가 체험의 “정서적인 기반을 강조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이런 생각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지만 일부 주관성이 남용되는 면이 있다고 해서 크리스천의 경험에서 신비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을 몰아낼 수는 없다." 로이드 존스의 설명을 들은 뒤로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은 물론이고 17세기에 활약한 영국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과 18세기 미국 사회를 움직였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비롯해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읽었던 작품들도 되짚어 보았다. 진리와 성령, 교리와 체험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길 요구하는 대목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탁월한 신학자로 꼽히는 존 오웬은 그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
복음을 주제로 설교하면서 교리적인 토대를 다지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청중들에게 간곡하게 권유했다. “마음에서 진정으로 ···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고백은 효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맛보는 경험은 기도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나는 한 차원 더 깊은 기도 생활을 추구하면서 의도적으로 직관에 반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역사적 성경 본문들로 돌아가서 기도와 하나님 체험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놓치고 있던 수많은 사실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기도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내면의 지침을 얻었다. 아울러 우리 시대의 영성에 얽힌 갖가지 주장과 운동들의 격랑과 회리바람을 넘어서는 영적 체험도 있었다.
참고로 스코틀랜드 신학자인 존 머리(John Murray) 정도였는데 여러 모로더없이 유익한 깨달음을 주었다. 존 머리는 베드로전서1: 8절을 인용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새번역). 개역성경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해석한다."
이 말씀을 곱씹을수록 베드로가 글을 읽을 모든 독자들에게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도는 “자, 여러분 가운데 뛰어난 영성을 가진 이들은 기도하면서 큰 기쁨을 맛보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다른 분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소망을 품으십시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기도하는 가운데 더러 숨이 막히도록 큰 기쁨을 경험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가슴이 뜨끔했다. '이성적 신비주의'라는 존 머리의 한 마디가 마음을 흔들었다. 하나님과 마주한다는 건 내면의 감정과 마음의 확신을 모두 아우른다는 말이다. 주님은 크리스천들에게 진리와 교리에 기대어 살지, 아니면 영적인 권능과 체험이 차고 넘치는 생활을 할지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 둘은 늘 붙어 다니는 법이다. 그동안 쌓인 신학적인 토대를 뒤로하고 '한 차원 높고 깊은' 체험을 찾아 뛰쳐나가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신학적인 진리를 삶으로 경험하게 도와주시길 성령님께 구하라는 것이다.
5. 그러므로 기도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정말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 갑상선암 수술을 무사히 마치자마자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네 가지 변화를 주었다.
❶우선, 몇 달에 걸쳐 시편을 통독하면서 한 편한 편을 요약하고 정리했다. 덕분에 규칙적으로 시편 말씀에 기대어 기도하는 습관이 들기 시작했고, 한 해에 몇 차례씩 모든 시편을 섭렵할 수 있었다.
❷둘째로, 성경을 읽은 다음, 기도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는 훈련을 했다.
❸셋째로, 아침만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❹넷째로, 더 큰 기대를 품고 기도하기로 했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두 해 남짓 꾸준히 실천하자 조금씩 돌파구가 열렸다. 오르락내리락, 엎치락뒤치락 하기를 거듭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단맛, 쓴맛을 다 보고 나니, 살아 있는 기도의 비밀이 새로운 시각에서 한결 뚜렷이 보였다. 다시 말해, 내 마음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평온한 경험뿐 아니라 악을 밟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기 위한 힘겨운 씨름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적인 생동감과 힘이 솟았다. 지금껏 좀처럼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글로 옮기기가 이만저만 어려운 주제가 아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 십중팔구 스스로 너무 보잘 것 없고 무기력하다는 자각이 드는 까닭이다.
☞ 기도는 참다운 자기 인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다!
☞ 마음의 변화, 다시 말해 사랑을 다시 조율하고 조정하는 주요 도구다!
☞ 하나님이 자녀들을 위해 마련하신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놀라운 선물을 수없이 베푸시는 방편이다!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안전하게 공급하시는 파이프라인이다!
☞ 하나님을 알고 마침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 기도는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찌 되어야 하는지 알려 주는 만능열쇠인 셈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