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듭난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기독교 윤리학
1.1. 한 사회의 관습 그 이상인 기독교 윤리
‘기독교 윤리학(Reformation Ethics)’에 대한 개념을 교회의 실천과 성찰의 역사에 의거해 철저하게 처음부터 다시 정립해야 한다. 교회가 헬라-로마 세계에서 좀 더 안정적으로 정착하자 이 세계도 교회 속으로 들어와 금욕주의적이고 수도원적인 응답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우리는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의 실제적인 위험성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관행이 되어 익숙한 장소, 습관, 행동방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가 ‘윤리’라는 단어다. '도덕'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서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의 관습적인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한 사회의 관습이나 관행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다.
1.2. 거듭난 인간의 삶이 기독교 윤리학의 내용
윤리학은 어떻게 우리의 본성적이고 창조된 은사를 사용하고, 어떻게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여 거듭나며, 여전히 질병과 유혹과 싸움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향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우리의 윤리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신학적인 윤리학은 그렇게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성령에 의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윤리학과 구별된다. 우리는 이 성경 자료를 추가로 발전시켜 우리 시대에 적용한다. 윤리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정을 다루므로, 윤리학의 내용은 회심 이전의 인간의 상태(본성적 윤리학), 거듭난 인간(실천신학), 여러 사회 영역에서 거듭난 인간의 삶으로 구분할 수 있다.
2.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역사적 개관
2.1. 초대 교회와 로마 카톨릭 시대
윤리라는 개념은 헬라인들 가운데서 생겨났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❶변증학(사고, 논리의 원리), ❷자연학(사물들의 존재와 관련된 원리), ❸윤리학(인간의 행위에서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이성과 도덕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과 그 원리)로 구분 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초대교회가 출현하였다.
기독교의 가장 초기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삶을 주목했고, 그리스도인의 행실과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특유의 계명과 교훈에 순종하는 동기를 설명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그리스도가 미래에 재림할 것을 소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가 살았던 대로 살았다.
로마 카톨릭은 좀 더 실천적이었지만, 도덕은 더 율법주의적인 것이 되었다. 기도, 금식, 구제, 순례 같은 선행 목록이 등장했고, 죽을 죄와 가벼운 죄의 구별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동일시 된 반면에, 땅의 영역은 그 자체로는 인정되지 않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것은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였다.(『보편교회의 도덕론』, 『선의 본질론』)
2.2. 중세 시대와 종교개혁
이전 시대에는 윤리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저작은 아직 없었다. 사람들은 이교 철학자의 예를 따라 도덕적인 격언을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복음은 율법이 되었다. 하지만 스콜라 신학자는 윤리적인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신비주의는 스콜라 신학의 방법론에 반발했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도덕을 위한 또 하나의 토대가 도입되었다. 행위는 은혜와 분리되었고, 믿음은 미덕의 원리가 되었으며, 성경은 도덕적 지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기독교 윤리학은 자신만의 토대와 내용과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철학적 윤리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겨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윤리학을 별개의 분과 학문으로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윤리적인 원리들을 제시했다.
2.3. 개혁파교회
개혁파교회의 윤리학 문헌은 훨씬 더 풍부하고 더 덕을 세우는 것이었다. 교의학과 윤리학은 츠빙글리에게서는 여전히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윤리적인 개혁, 즉 성경에 따라 삶과 도덕을 새롭게 하는 것을 추구했다. 츠빙글리의 근본적인 오류는 시민적 정의와 신적 정의, 본성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었다.칼빈은 윤리학을 별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기독교 강요』 전체에 걸쳐, 특히 3권 6-10장에서 거듭남(poenitentia), 자기부인, 십자가를 지는 것, 내세의 삶에 대한 묵상, 현세의 삶의 적절한 용도를 차례로 다루었다.
그 밖의 다른 중요한 윤리학적 주제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3권19장), 기도(3권 20장), 도덕법 해설(2권 8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은 순전히 기독교적인 토대 위에서 윤리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기독교적 윤리학을 철학적 윤리학과 분명하게 구별했다.
3. 영적인 삶: 결의론과 금욕 신학
(결의론: 교회, 사회적 관습을 성경에 비추어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론)
3.1. 결의론
도덕적 삶을 다룬 이 윤리학 저작들 외에도 결의론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결의론과 윤리학의 관계는 판례법과 법철학의 관계와 똑같다.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도덕법을 다루는 것과 일치했다. 즉 “나는 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의론은 독자적인 신학 분과가 되어 진정한 윤리학을 밀어냈다.
성경에 나오는 결의론의 예로는 마태복음 22:15-22절(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가?), 누가복음 14:3절(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합당한가?), 고린도전서 7:8,10절(기혼자와 미혼자에 대한 바울의 지시) 등이 있다. 결의론은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더욱 발전했고, 중세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아주 치밀하게 발전했다. 모든 가능한 상황이 고찰되었고, 온갖 종류의 자의적인 판단의 문이 열렸다. 개인의 자유는 제거되었고, 양심은 혼란에 빠졌으며, 그 결과는 회의주의와 개연설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개연설’은 누구든지 어떤 영적 권위가 허락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기만 하면 성경의 명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 주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윤리학이나 결의론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혼, 고리대금, 조세, 시민적 권위에 대한 순종 등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의론은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고, 우리 모두는 결의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결의론은 개혁파에서도 발전되었지만, 반드시 이전 시대의 스콜라 신학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결의론은 사실 윤리학의 한 특별한 단원이다. 결의론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개혁파교회에서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다.
3.2. 금욕 신학
이 모든 것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의무와 실천을 다룬 금욕 신학을 추가해야 한다. 금욕 신학은 특히 기도, 금식, 철야 같은 경건을 위한 도구를 우리에게 소개한다는 점에서 존재 이유가 있다. 결국 윤리학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론의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은혜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금욕 신학이라는 용어는 중세 시대의 수도원적인 금욕 관행 때문에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성경적인 참된 개혁파 금욕 신학이 존재하고, 이 신학은 디모데전서 4:7절(행24:16)에 요약되어 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3.3. 19세기의 윤리학
1750년 이후의 윤리학 분과의 특징은 행복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이며 합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공리주의에 반대했고, 의무의 엄숙함을 인정했으며, 온갖 타율성을 배척했다. 칸트는 추상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도덕만을 제시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윤리학은 그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윤리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공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선은 본성에 합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윤리학은 그런 의미에서 활동을 다룬다.
4. 용어
'윤리'라는 용어는 헬라어 '에토스'에서 왔다. 단수형은 '익숙한 장소'를 의미하고' 복수형은 짐승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나 짐승의 거처'를 의미한다. 사람에 대해 사용된 경우에는 한편으로는 기질, 성격, 성향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습관, 관습, 행동방식을 의미한다. 원론적으로 볼 때 '모스'를 '도덕'으로 번역하든 '윤리'로 번역하든 아무 차이가 없다.
하지만 '도덕'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도덕적 설교를 연상시킴으로써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반면, '윤리'라는 용어는 아직까지는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윤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한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도덕은 실천적 도덕으로 이해되고, 실천적 도덕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사용하는 일련의 규칙을 가리키므로, 사람들이 외적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귀납적 서술인 반면, 윤리는 대상에 대한 좀 더 학문적이고 연역적인 서술로 이해된다는 점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윤리는 좀 더 깊고 규범적이다.
모든 사회는 이미 기존의 확고한 관습, 규칙, 사회적 행동, 도덕을 지니고 있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 가족, 공동체는 개인의 행위를 결정한다. 도덕은 지배적인 관습과 일치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은 도덕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의로움, 거룩함, 경건함에 대해 말한다. 성경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를 주관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 개혁파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도덕적인 삶을 말할 수 있는가?
아주 분명하게 “그렇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고백적인 삶은 회심에 의해 퇴화되지 않는다. 우리의 도덕적인 삶은 먼저는 우리의 본성적인 삶, 다음으로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한 형태를 제공해 준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후리의 삶, 지업, 사회, 교회, 국가, 예술과 학문 속에서의 우리의 삶은 여전히 똑같다.
2. 믿음, 거듭남, 성화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본성, 성품 등에 맞춰 인간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 윤리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 행위,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삶 전체는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바라보아야 한다.
▣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기독교 윤리학은 존재한다.
1.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 안에 도덕적인 방식으로 심겨 있고 발전되며, 2. 그리스도의 생명은 밖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도덕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마땅한 존재일 수 있게 해 주거나 그런 존재가 되게 해 줄 수 있는 삶을 가리킨다. 그런 도덕적인 삶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 기독교적이고, 행위 언약을 부정하는 것이다. 윤리학은 도덕을 다루는 반면, 실천신학은 신앙을 다루는데, 신앙과 도덕을 혼동하거나 뒤섞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윤리학과 이 실천신학은 두 가지 별개의 분과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 이 둘을 함께 다루어야 할 몇 가지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윤리학을 실천신학과 분리하는 경우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가볍게 다루어지고, 윤리학은 교의학으로부터 해방되어 펠라기우스주의로 귀결된다.
2. 앞에서 보았듯이, 도덕적인 삶의 유일한 내용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영적인 삶, 즉 신앙이다. 영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을 함께 고찰하게 되면,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삶으로 보고서 행위 언약을 정립하는 것을 막아 준다.
3. 신앙과 도덕은 두 가지 별개의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함께 묶여 있다. 신앙은 도덕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실천신학과 윤리학을 함께 다루게 되면, 신앙과 도덕의 상호관계가 촉진되어, 영적인 삶이 감정이나 정적주의나 경건주의로 표류하는 것을 막아 주고, 영적인 삶이 행실, 행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을 돕는다.
따라서 윤리학을 교의학이나 실천신학과 연결시켜야 하는데, 우리는 후자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윤리학을 교의학과 연결시키는 경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논의되지 않고 남겨져서 무시됨으로써, 윤리학에서 다루어야 할 것들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 윤리학이 다루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어떻게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존재인 인간은 첫 창조 때에 주어진 은사와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2. 어떻게 인간은 거듭나고, 그 삶은 여전히 질병과 유혹과 싸움에 종속되는가?
3. 어떻게 윤리적 삶에서 인간의 행위(명철, 의지 등)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향하여 자신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드러낼 수 있는가?
▣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이란?
◒ 윤리학은 영적인 인간의 준비, 탄생, 발전, 외적인 나타남을 다룬다.
◒ 윤리학은 “하나님에 의해 구속된 사람들의 발전의 역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하는 은혜, 즉 인간 개개인의 삶의 모습 속에서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생명에 대한 학문적 서술”이다.
◒ 윤리학은 인류 속에 구체화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몸의 기원과 성장과 완성을 서술한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우리에 대하여 및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의 토대 위에서와 그 역사를 통해 거듭난 공동체가 탄생하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한다.
◒ 윤리학은 우리의 내적이고 외적인 성화에 대한 진리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가는 것에 대한 학문이며, 열매를 많이 맺고 경건하게 살다가 잘 죽는 것에 대한 학문이다.
▣ 교의학과 윤리학의 차이점
그 차이는 교의학은 이해와 지식을 다루는 반면에, 윤리학은 의지와 행위를 다룬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런 구별은 결국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절반은 순전히 지성적인 것이고 또 다른 절반은 순전히 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 교의학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및 우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다룬다. 교의학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다. 교의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서 우리의 외부로부터 및 우리 위에서 오고, 우리는 수동적이고, 경청하며, 우리 자신을 열어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 윤리학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할 때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다룬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능동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감사하여 시편을 노래하고 찬송한다. 교의학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내려오는 반면에, 윤리학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 교의학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것인 반면에, 윤리학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다. 교의학에서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임을 아는 반면에, 윤리학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이마에 기록될 것이다.(계22:4) 교의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반면에, 윤리학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교의학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반면에, 윤리학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에 의거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따라서 교의학과 윤리학의 차이는 우리가 윤리학을 고찰할 때 택하심의 교리를 약화시킨다거나, 우리가 준-펠라기우스주의자가 되어 인간을 궁극적으로 '독자적인 존재'로 취급하여 인간에게 정당한 지위를 회복시켜 주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하는 분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소명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므로 우리가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은 신비다.
5. 윤리학의 구분과 구성
윤리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서술이므로, 윤리학이 다루어야 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윤리학의 이런 의도와 목적을 위해 개신교 정통 신학이 제시한 윤리학의 구분은 사실상 똑같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윤리학을 3부로 구분해야 한다.
❶ 회심 이전의 인간 : 죄의 상태, 양심, 도덕. 이것은 자연 윤리학의 영역이다. ❷ 회심한 인간 : 새 생명의 삶의 준비, 기원, 여러 측면, 상황, 보조도구, 복, 표지, 질병과 죽음, 성취. 이것은 실천신학의 영역이다. ❸ 회심한 인간과 가족, 직업, 사회, 국가, 교회.
우리는 이 세 부분을 아래에서 다룰 것이고, 윤리적 행위의 결과를 통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원과 발전과 완성을 결론적인 요약으로 제시할 것이다.
6. 윤리학의 토대와 방법론
우리는 거듭난 사람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원하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따라서 관련한 진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일 때에만 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윤리학은 신학적이다. 우리의 윤리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윤리학에서 죄, 거듭남, 성화, 우리가 국가 등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관련된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제 윤리학의 토대가 우리에게 분명해졌다. 예컨대 직관적이거나 공리주의적인 도덕을 기본적인 원리로 삼을 수 있는 철학적 윤리학의 토대는 신학적 윤리학의 토대와 다르다. 도리어 우리는 윤리학의 토대를 교의학과 유사하게 지식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성경은 가르침과 삶의 준칙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서에서는 성경은 “우리의 신앙을·····규율하기 위한”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윤리학은 교의학과 마찬가지로 성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온전히 성경에 의거한다. 개혁파 사람들이 매번 성경을 언급함이 없이 미덕과 의무에 대한 자신들의 가르침 전체를 십계명과 주기도문에서 도출해 낸다는 사실은 그들도 성경을 윤리학의 원천이자 규범으로 여긴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보여 주는 것이다.
윤리학에서도 구약성경은 교의학에서와 똑같은 가치와 권위를 지닌다. 신구약 성경의 도덕법은 똑같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도덕법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려운 문제인 것은 구약성경은 한편으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따라야 할 준칙은 신구약성경에서 일시적이고 일회적이며 역사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에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의학과 윤리학에서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로마 가톨릭, 루터파, 재세례파, 감리교, 모라비아파 등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그리스도인의 삶인 개혁파 윤리학을 제시한다. 기독교적이라는 것과 개혁파적이라는 것 간에는 어떤 구분도 없고, 어떤 합성도 없으며, 어떤 융합도 없다. 그것은 "개혁파적'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것", “철저하게 개혁파 교회가 이해하고 고백한 대로의 기독교적인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적'이라는 것과 '개혁파적'이라는 것은 대비나 합성이나 병치가 아니라 종합이자 통일을 나타낸다.
"기독교적인 것은 개혁 파적인 렌즈를 통해 우리에게 오고, 개혁파적인 프리즘을 통해 지극히 순수하게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