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장1-15절 주전250330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 다급한 소식에도 왜 서두르지 않으셨을까?
1.1. 위태로운 때에 베다니에서 온 위급한 소식
이 무렵, 주님의 지상 생애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점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다가왔던 때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와 흉악한 계략에 시작되고, 그 일이 점점 엄습해 왔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정황이 복음서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예수살렘 상황이 매우 엄중한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예루살렘 근교(2km)에 있는 베다니에서 온 소식은 주님과 제자들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요11)을 두고 감도는 긴장과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나사로는 유대 지역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왔다.”(18-19절)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음모와 살해위협이 팽배한 때이기에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겨우 요단강을 건너와 동쪽 베레아 지역에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근교(2km) 베다니 마을에서 심부름꾼이 왔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다급한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아직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역에 계실 때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라버니의 위급한 상황을 알린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자”(3절)로 묘사한 것으로 볼 때, 예수께서 두 차례(마26:6 나환자 시몬의 집 방문, 요12장1-8절의 나사로의 집 방문)의 베다니 방문 사이, 어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사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과 이 가정은 서로 알고, 주님이 이 가정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였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예루살렘 방문 때마다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은 (제자들과 함께) 숙소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매우 위태로운 시기에 하필이면 이 무렵에 사랑하는 나사로의 위급한 상황일 전달된 것입니다. 이 무렵에 베다니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자 굴속으로 들어가는 꼴입니다. 위급한 상황과 안타까운 상황이 겹쳐 있습니다.
1.2.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
주님은 그 심부름꾼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요11:4) 그 자리에 있던 사도들도 그 대답을 함께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대답으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이렇게 추론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이다. 그의 회복은 주님이 말씀하시고, 치유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에, 나사로가 회복되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라고 추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로의 질병의 최종적인 결말은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죽음이 도래할지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였습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뜻이 담겼습니다. 실제적으로나 문자적으로,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담기기도 합니다. 이런 때마다 앞으로 실제 사건이 일어날 때, 그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하지만 심부름꾼이 나사로의 자매들에게 주님의 대답을 전하기도 전에 나사로는 이미 죽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두 자매 마음에는 어떤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들이 말한 대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21절) 아마도 심부름꾼의 메시지가 너무 늦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에 맞게 도착하셨다면, 나사로가 살았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거나 의심할 의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단지 늦게 도착하신 주님 앞에서 너무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의 말에는 슬픔과 아쉬움이 깊이 배어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슬픈 죽음의 권세 앞에서 체념해야만 하는 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일 뿐입니다. 자신들 앞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죽음에 대한 막강한 권세를 아직은 알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1.3. 왜 이틀을 더 지체하셨을까?
주님 앞에는 지금 “인성적인 차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알면서도 계시던 곳(요단강 건너편 동쪽 베레아) 지역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하심”을 앞으로 있을 일의 관점으로 주목해야 합니다. 인성적인 차원에서 매우 위급하고 안타까운 일이 펼쳐져 있습니다만 어떤 두려움 때문에 지체하신 것도 아니고, 안타까운 일이 위중하기에 성급하게 서두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차분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주님이 지체하신 것은 인간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신적권능을 아무렇게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라는 관계를 앞세우지도 않으시고, 위급한 상황에서 비겁하게 뒤로 물러선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사로의 상황을 두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신 것은 일종의 “엄숙한 침묵”입니다. 마치 폭풍 속에서 제자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요동치는 배 위에서 잠자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나,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서두르지 않으신 것은 철저히 인간적인 관계를 앞세우지 않으시고, 신적인 권세를 아무렇게 휘두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매진하셨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 자체가 “사랑을 베푸시는 사역”입니다. 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실 때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결코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사역으로 매진하시고, 그런 사명감과 확신 속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뜻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1.4. 적용할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서두르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위태로운 상황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그 죽음으로 보이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짐하신 것입니다.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열망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의 영광입니다. 사적인 영광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단의 유혹도 그런 차원입니다. 자신의 사적인 영광을 철저히 배격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데 매진하신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명감으로 매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성심과 그리스도의 열정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매우 가까운 상황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그 때마다 요동치는 마음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도 그 순간 유대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자고 하실 때였습니다. “그 후에... 유대로 다시 가자!”(7절) 그 순간 제자들은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 심지어 도마는 인간적인 의협심으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쳐댑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느냐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물론 상황을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만 상황에 매여 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상황을 붙잡고, 상황을 이용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주는 교훈입니다.
2. 유대로 다시 가자!
2.1. “유대로 가자!”는 주님 말씀의 뜻은?
“유대로 다시 가자!”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다급한 소식을 듣고 난 다음 이틀이 지나서야 주님이 침묵을 깨트렸습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7절) 이제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나사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에 감히 아무것도 여쭙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역에서 행하신 사역이 마감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목적지는 유대 지역에 있는 베다니였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사실상 유대지역의 사역을 마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제 끝내고 유대에 들어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엄청난 일을 향하고 계신 결단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때문에 앞으로 있을 유사한 모든 경우를 대비하여 큰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유대로 다시 들어가신다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입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는데 또 다시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 주님은 제자들에게 상징적인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일할 수 있는 낮이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되었다.” “낮 동안에는 어떤 대적도 그것을 단축시키거나, 중단시킬 수 없단다.” “낮 동안은 열두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에는 길을 행하는 자에게 실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을 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낮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날이 저물고, 빛이 사라지면 그 때는 빛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 말씀은 엄청난 일을 가져올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이요 공포였습니다. 사실은 아주 특별한 여행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유대로 가자는 주님의 말씀은 사실상 모든 전도사역을 마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발걸음의 재촉입니다.
2.2. 나의 장례를 위하여 간직하게 하라.
요한복음 12장 첫머리에서 주님은 아주 인상 깊은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다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분노했습니다.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줄 것을 여기에 부었냐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12:7) 분명 주님은 이 무렵에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살인 감정이 최고조였고, 주님의 사역도 막바지에 이릅니다. 이 무렵에 유대로 들어가는 일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틀 만에 침묵을 깨신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당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시는 장면을 충분히 밝히셨습니다. “나의 장례를 위하여 간직하게 하라!”
심지어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어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모든 사람의 죽음은 생명을 빼앗김 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음에 대한 권세가 있으십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권세가 있으십니다. 요한복음10:17-18절입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주님이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하신 말씀은 단지 친구 나사로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로 달려가는 장면입니다. 아직 부활의 신앙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지 않고 있는 제자들과 사람들을 위하여, 그 믿음을 위하여 나사로를 살리셔야 했습니다.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고자 신적인 권세를 휘두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앙을 깨뜨리시려고 위험한 유대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우리의 “부활의 신앙”을 그리스도께 집중하게 하시고, 실제적으로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는 장면으로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신 이 표적은 주님의 모든 표적들의 절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표적은 주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궤멸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내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강열한 열망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철저히 궤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내려주신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본문입니다.
단지 사랑하는 친구를 치유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신적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계시하셨습니다. 오직 이 길만이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도 아버지의 영광에 잇대어 있습니다. 오직 이 길만이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길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세력도 주님의 신적권세 알래 가두셨습니다. 주님은 죽으실 권세도 있으시고, 다시 사실 권세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죽음도 너무 비참한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짊어진 형벌이요, 율법의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예고하신 사건이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빈 무덤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먼 훗날 누구나 다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빈 무덤으로 만든 이 사건은 주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실 것인지를 강력하게 천명(闡明)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빈 무덤을 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가는 길은 주님이 예비하시는 집으로 귀향하고 있는 길입니다.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생애를 다하셨습니다. 그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따라 그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모든 성도의 선한목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길을 걷고 계십니까? 그분의 생생한 품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을 누리며 살기 바랍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날마다 품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팔은 목자의 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