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큰 일 01】하나님은 인간의 최고선(最高善)이시다!
"내용을 낭독했는데 이 내용을 글로 공유해야 하겠습니다. 저 자신도 너무 유익했기에 공유합니다."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의 최고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보존자이시며,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모든 선한 것들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매 순간마다 유일하시고 영원하시며 어디에나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만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인간의 신적 기원과 유사관계를 그에게서 지워버리고 파괴할 수 없다. 그는 그런 하나님의 형상 속에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지식과 의와 거룩의 고상한 속성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에게 주신 선물 중 “작은 잔재들”이 현재 그에게 남아있다. 이것들은 그의 모든 죄책을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전에는 고귀했음을 증거 하고, 인간의 신적 소명과 하늘의 운명을 계속 상기시킨다.
인간의 사색과 아는 것은 비록 그것이 두뇌에 제한될지라도, 그들의 본질에 있어서 전적으로 영적 활동이며,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손으로 만지는 사물들을 넘어 훨씬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는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나 실제적으로는 실존해 있고 땅의 물질보다 더 본질적인 실재를 소유한 세계와 그런 사색을 통하여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요. 영원하고 불멸의 진리이며, 영적 진리인 것이다. 그의 이성은 그런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 안에서만이 진정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육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의존하고 있는 것은 땅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욕구의 세계를 넘어 이성과 양심에 의해서 더 높고 색다른 선한 것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받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즐겁고 유용한 것들이란? 장소와 때에 따라서 그들의 가치가 달라질지라도 결코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즉, 그가 찾고 있는 선한 것이란 환경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선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영원하고 불멸하는 영적인 선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그 고귀하고 절대적인 신적 선 안에서만 계속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이성과 의지 모두가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각적인 쾌락과 이 땅의 보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런 모든 것에 만족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 많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이 인간을 만족시키기에는 아무런 힘이 없고, 그의 높은 운명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게 된다. 그러나 소위 이상적인 가치들, 즉 과학, 예술, 문화, 봉사,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 이웃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에 대한 갈망 등 이런 가치들이 사려(思慮)되었을 때 그 판단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들 역시 모두 세상에 속해 있으며, 이 세상도 그에 대한 인간의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요일 2:17)
먼저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살펴보자. 성경이 요구하는 그런 지식은 그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함에 둔 지식이다(잠 1:7). 지식이 이로부터 멀어져 그것과 관련이 없다면 비록 그것이 지식의 이름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이 세상 지혜일 뿐이다. 하나님을 떠난 과학과 철학은 점점 더 어리석은 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3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 지식은 언제나 특별한 성격을 띠고 있고, 소수 사람들의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현존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깊은 욕구를 도저히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여러 과학은 몰락의 시기를 지난 후 다시 재생의 시기에 이를 때는 언제든지 특이하고 과장된 기대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새로운 신비 속에 머물고, 그때 그 과학의 목적은 우울해지고, 인간들은 땅에서 수수께끼 속에서 방황하고, 생명과 운명은 모두 신비한 것들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절망적인 고백에 이른다.
과학이 사실 지금 성취한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알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불만이 남아 있을 수는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도덕적 기초가 없는 지식들은 좀 더 큰 악을 알고, 악을 실행하는 데 쓰이는 흉기와 같고, 그런 지식으로 가득 채운 머리는 부패한 마음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둘째, 예술의 경우에도 다를 것이 없다. 예술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리 잘 다룰 수 있을지라도, 그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상상력 안에서만 제공되고 있다. 예술은 인간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증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 예술은 영원한 저편의 것을 유한한 이편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예술은 결코 가장 거룩하고 가장 고상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유일한 종교나 유일한 구원도 아니다.
셋째, 기타 인도주의, 문화, 인간의 봉사, 사회를 위한 생활, 혹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궁극적으로 이들 역시 “인간의 최고선”이라 명명할 수 없다. 사회를 위한 생활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명령에 그 기초를 두지 않으면, 이것은 그의 힘과 확신을 잃어버린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항상 무언중에 아주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무한한 의지의 힘을 요구하고 자기 관심과 이기적인 힘과 계속해서 싸워야 할 감정이요 행동이다.
인류는 지금 발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당혹스럽다. 낙관적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비관적이다. 결국 이웃을 사랑하든 인류를 위한 섬김의 삶을 살아가든 하나님의 법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으면 그 힘과 그 성격을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는 인간은 결코 안식하지 못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이 단락의 결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대로 엄밀히 말해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바른 방법과 바른 길에서 찾지 않고 있으며, 참된 장소에서 그분을 찾지 못하고 있다.
파스칼(1623-1662)이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은 위대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진리를 갈구하나 본성이 잘못되었다. 그는 영원한 행복에 헐떡이지만, 일순간의 쾌락을 잡으려고 한다. 하나님을 찾지만 피조물들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산다. 인간은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이지만 낯선 땅에서 돼지의 건초를 먹고 자라는 존재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결코 물이 고이지 않을 터진 웅덩이를 파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렘 2:13) 그는 굶주린 사람처럼 먹고 있는 꿈을 꾸나, 깨어나면 그의 영혼이 비어 있음을 느끼고, 목마른 자와 같이 마시고 있는 꿈을 꾸고 있으나, 깨어나면 곤비하여 영혼에 갈증을 느끼는 존재다.(사 29:8) 인간은 그 해결책을 하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오늘의 기도
맞습니다.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주님은 만물 가운데서 저희를 부르셨고, 부르신 저희들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셨으니,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저희가 그 어디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누릴 수 있도록 내려주신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주님의 사랑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으나, 괴로움뿐입니다. 그러하므로 저희들이 이 세상의 것들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김 당하지 않도록 은혜와 진리로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도 저희들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은 저희들의 최고선”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