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에 장애물이 되는 것들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 제 11장 요약정리
그리스도인이 갖는 구원의 확신은 자기 확신과 자신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확신,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양자의 영이요 은혜의 인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유산인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으로, 율법폐기주의자로 몰고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이며 건강한 경험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것은 대체로 병적인 상태다. 이런 병적인 상태의 여러 가지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초와 수단을 혼돈함
이것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가장 미묘한 장애물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흔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구원의 확신을 얻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과 구원의 기초를 혼동하곤 한다. 자신의 섬김을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삼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신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잠시 버려두고 일단 어떻게 확신을 얻을지 생각해 보자”라는 식의 말은 전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단순히 우리의 성화만 살펴서 진정한 확신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리의 섬기는 삶으로 구원의 확신을 확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원의 확신의 기초는 그리스도께 있다.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신앙의 핵심에 기반하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신뢰하고 확신해야 한다. 참 신자라면 구원의 확신과 함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는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히브리서가 제시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2. 신앙생활이 일관되지 못함
믿음과 사랑의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을 버리고 사랑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실질적인 순종이 없는 것은 곧 그분을 구주로 사랑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현실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자각하지 못하면 확신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불순종으로 흐른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잃게 된다. 시편 51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통스러운 참회의 부르짖음이 이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불순종하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용서에 대한 그의 의식이 흐려졌다. 그 영혼은 이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의 증언을 완전히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즐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성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남모를 의심이 싹트고, 확신이 약해진다. 일관되지 못한 삶은 성령을 슬프게 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구속이 확실하다는 의식을 약화된다. 그렇다면 치료제는 무엇인가? 치료제는 ‘회개'라고 하는 구토제다!
3.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함
구원의 확신의 부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고난의 역할을 오해한 까닭일수도 있다.
윌리엄 쿠퍼의 표현처럼 섭리가 눈살을 찌푸리면 “너무도 두려운 구름”만 보인다. 그로 인해 “약한 감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만나자마자 하나님의 눈 밖에 났다고 결론짓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언제나 회복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 없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인생의 상황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은혜와 구원에 관한 확신을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에서 찾으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렇게 하면 인생의 풍랑이 몰아칠 때 우리를 단단히 고정해 줄 닻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분께로 단단히 고정해 주신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이미 중명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로 승천하여 다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고난의 여러 기능}❶고난은 우리를 바로잡는 기능을 가졌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❷고난으로 인격이 성숙해지기도 한다. 환란이 인내를 인내는 소망을 낳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참을성 많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인내는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드러나고 발휘되며 강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키우는 ‘하나님의 일’일 수 있다! ❸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분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과 약한 데서 온전해지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견했다. 그가 약할 때 사역이 성공함으로, 그것이 그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서 이루어진 성공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
하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다시 우리의 시선을 고정한 뒤에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과 그분이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생각하라!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히12:5-6)
4.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분별하지 못함
“죄의 정죄와 지배는 끝났지만 죄 문제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확신의 네 번째 장애물은 칭의와 중생이 그리스도인과 죄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중생 후 급격히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 때문에 오해하기 쉽다. 솟아나는 구원의 기쁨과 순종하려는 욕구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다가 다시 죄를 짓는 모습을 자신에게서 보고 자신의 회심이 구원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자신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약의 주제가 매우 중요하다. 21세기의 처음 몇 십 년 사이에 이 주제에 관한 저작 활동이 크게 부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18세기 스코틀랜드 국경 벽촌의 목사 한 명이 거의 혼자 힘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중요성을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알렸다. 그 목사는 물론 ‘토머스 보스턴’이다. 보스턴은 바로 “인간 본성의 4중 상태”로 그런 엄청난 일을 해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주는 실제적인 의미}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그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최종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의가 우리의 것이 되었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는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여전히 죄인이다. 죄가 여전히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 우리의 중생이 이생을 넘어 완전히 꽃을 피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죄의 존재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런 구별이 매우 중요하다! |
정죄는 사라지고 죄의 지배는 끝났지만 죄는 여전히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죄에는 여전히 우리를 기만하고 유혹할 잠재력이 있다. 이 점을 이해해야만 죄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없는 것으로 혼동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확신이 상황에 따라 요동칠 수밖에 없다!
5. 타고난 기질의 문제
‘영혼 치료’에 뛰어난 사람들은 타고난 기질이나 환경에서 비롯한 기질이 우리의 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확신에 관한 분명한 교리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성령이 확신을 주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확신은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 주시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에 관한 생각’이 우리 자신에 관한 생각,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확신은 하나의 의식이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는 저마다 다른 삶의 배경, 복음에 대한 이해, 심리적 배경을 지닌 개인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복음이 들어오는 데 유난히 장애물로 작용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 믿음과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천부적인 기질 때문에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결국 우리는 육체와 감정을 지닌 존재다. 우울한 성격은 확신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이런 배경에서 온전한 믿음의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히브리서의 권면(히10:2)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자비롭고, 동정심이 많은 대제사장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분은 연약한 육신을 입고 타락한 세상에 오셔서 우리처럼 병에 걸리고 유혹에 시달리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성격이 우울해서 의심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은 이런 구주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 확신을 얻어야 한다. 이런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거리감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특히 그리스도를 가깝게 느끼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부활 전 연약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하신 말씀 중 끝에서 두 번째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라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멀리 느끼는 사람들에게 은혜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자 이만큼이나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다.
6. 마귀의 공격
‘마귀의 공격’ 또한 확신하는 데에 또 하나의 장애물이다. 마귀는 특별히 이런 목적으로 공격할 때가 많다. 사탄은 그리스도가 구원하신 자들을 멸망시킬 수 없다. 그래서 그분과의 새로운 관계를 '즐기지' 못하도록 막는 데 주력한다. 사탄은 인류의 첫 부부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이 첫 번째 유혹은 까마득한 과거에 이루어졌지만 지금도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갑작스럽거나 큰 시험에··· 여러 모양으로 흔들리고 약해지고 중단” 되는 경험을 한다고 말한다. 이 점을 알고 나면, 바울이 로마서 8장에 기술한 결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로마서 8장 37-39절에 나타난 확신의 선포} 즉,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장 31절에서 시작된 일련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아마도 이런 질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질문이 비인칭대명사인 “무엇”이 아니라 인칭대명사 “누구”로 시작된다는 점일 것이다. 바울은 '무엇이 우리를 대적하리요? 무엇이 우리를 고발하리요? 무엇이 우리를 정죄하리요?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묻지 않았다. 바울의 질문은 계속해서 “누가”로 시작된다.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사탄이다. 바울은 사탄의 방해 공작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붙들었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가 완전하고도 최종적이라는 점을 확신의 근거로 내세운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독생자처럼 완전하고도 영구적으로 의로워진 사람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해도 좋다.
7. 믿지 못할 '인간의 양심'에 따름
“양심을 따르라.” 이것은 예로부터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원칙이다. 하지만 이 원칙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대로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 완전히 믿을 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양심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할 수 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심을 조정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흥미롭게도 스스로 '강한 양심'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바울이 말한 “연약한" 부류에 속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양심이 오히려 확신하는 데 방해가 된다. 양심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외에 다른 면에서도 양심은 확신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즉, 양심은 우리의 자유를 성경보다 더 제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제한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시지 않을 때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면 우리는 그런 시각에 따라 하나님을 보게 된다. 양심이 비성경적으로 우리의 삶을 제한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제한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양심이 우리 삶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이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제한적이고 덜 너그러우신 분으로 보게 된다. 설교자라면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확신을 즐기지 못하고 속박의 영에 묶이며, '사탄의 신학'에 빠지게 된다.
8. 태만
사랑과 확신의 관계를 강하게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 누리는 확신을 키우기 위한 중요한 수단들을 주셨다. 그런데 이런 의식, 소위 ‘은혜의 수단’을 오용하거나 무시하면 확신이 흔들릴 수 있다. 시편 42-43편에 나오는 영혼은 무엇보다도 예배와 사역, 교제의 삶에서 벗어나 낙심과 혼란에 빠졌다.
히브리서는 온전한 확신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면서 예배와 교제를 무시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시편과 찬송가, 찬양을 부르며 사랑과 선한 일을 위해 서로를 권면한다. 그 모든 것은 신성한 의례(儀禮)로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확신을 증진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방해를 받고 확신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세례와 성찬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씀에서 얻는 것과 똑같은 것을 성례에서 얻지만, 그것을 더 온전히 얻을 수 있다. 성례를 통해 믿음이 강해지고 우리 영혼의 반경이 넓어졌기에 이제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전에는 그리스도를 약하게 경험했지만 이제는 직접 손으로 만지듯 온전히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더 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성례는 꼭 필요하다.
9. 검은 구름이 우리를 뒤덮을 때
“하나님이 얼굴빛을 숨기시어 심지어 그분을 경외하는 자라할지라도 흑암 중에 행하거나 빛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8:4)
신약에서는 이런 확신의 부재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그런 흔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교회는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에 관한 이사야 51장 10절을 통해 구원의 현실이 구원의 확신으로 이어질 때까지 믿음이 자라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다.
단, 다시 말하지만 확신에 심리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심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하나님 얼굴빛이 숨겨진 느낌이 오래 지속되고 아무런 위로도 없을 때는 우리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신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육체적 이유가 없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져 확신이 약해질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육체적 상태 때문에 우리의 영이 안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주신 약속이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 의심하는 영혼은 이 말씀 안에서 쉴 수 있다.
이상 9가지의 장애물을 살폈다.
끝으로,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율법폐기주의와 방종이 아닌 은혜로운 열매를 낳는다고 말한다.
“성령 안에서 그 마음이 화평과 기쁨으로 또한 하나님에 대한감사와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능력 안에서 즐거움으로 순종의 의무를 다하게 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3)
신약의 교회에는 바로 이런 기쁨의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전도의 담대함, 기도의 열심과 친밀함, 시련과 위험과 반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예배의 기쁨을 낳았다.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은 곧 이것을 낳는 확신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확신은 방종이나 율법폐기주의가 아닌 ‘진정한 겸손’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자기 확신과 자신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확신,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양자의 영이요 은혜의 인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유산인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 이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슴 깊이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확신이 우리 시대에 너무도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