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계속되는 사역으로 믿음은 성장해 갑니다.

인천열린 2025. 1. 12. 17:12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1.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1:51, 요2:1-11)

 

 

들어가는 말

 

오늘은 나다나엘의 관점으로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의 본문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의 믿음은 이제 막 시작된 믿습니다. 물론 함께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인잔치 표적에서 제자들이 믿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시작된 믿음인데, 그리스도의 혼인잔치 표적은 제자들의 믿음을 일으키고, 더 굳건하게 세워져가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다양한 서역을 통해서 저들의 믿음을 일으키시고, 굳게 세워 가시며 성장시켜 가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의 믿음을 성장시켜 가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참 믿음은 점점 성장합니다.

 

1.1. 요한복음에서 쓰이는 믿음이라는 용어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단어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한 번도 명사형(belief 정적이고 고정적이며 완성된 뜻)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믿는다.”(believing, believe) 동사형이나, 동사형에서 파생된 분사 형을 사용하여 능동적인 행위이고, 의지(will)가 동반되며, 고정적이지 않고, 늘 성장하는 믿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현재 자라가고 있는 믿음으로, 유동적이어서 점점 성숙하는 믿음을 표현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믿음은 각종 어려움과 시험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의 전체에서 성장/발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단계적 발전을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믿음은 정체되어 있는 추상적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 어디서든 실제적으로 적용되며, 겪어가고 형성해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1.2. 믿음과 관련된 아는 지식표적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복음서에서 아는 것사고의 지성적 획득이 아니라, “연합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아는 것은 곧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처럼(15:1-3) “연합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믿음은 그 관계 속에서 점점 자라가는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표적(signs)을 많이 사용됩니다. “표적은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하지만 표적만으로 믿음이 생기거나 자란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표적에만 의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만 의지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3장의 니고데모나 요6장의 사람들도 모두 표적을 통한 믿음을 추구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1)“표적을 무시하는 사람, 2)“표적을 거부하는 사람, 3)“표적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보여줍니다.

 

1.3. 그렇다면 표적만으로 부족한, “믿음의 발전은 어디서 보완되고 보충되어 완성되는가?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표적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오해와 잘못 해석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생생하게 성장해 가는 믿는 것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기록에 담지 못한 수많은 표적들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을 일으킬, 충분한 여러 소재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표적행적’, 말씀예언의 성취사람과의 관계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재들은 성령께서 각 사람들(제자들)의 믿음을 점점 완성 해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사역이요, 성령의 사역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이 실제적으로 실현되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소재들의 스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이라는 책은 발전하는 믿음”, “성장하는 믿음”, 또한 새롭게 태어나는 믿음을 그림처럼 우리에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의 줄거리요, 완성되어 가는 그림이며, 생생한 복음의 역사입니다.

 

1.4. 나다나엘의 믿음과 성장

 

오늘은 나다나엘의 관점으로 본문을 읽고자 합니다. 아직 그는 믿음의 출발점에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첫 만남에서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압도됩니다. 나다나엘의 믿음은 이제 막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완성된 큰 믿음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옳게 고백했지만,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아직은 따라야 할 선생으로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식했습니다. 나다나엘의 미음은 이제 시작입니다.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다나엘과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실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의 큰 영광이나, “이스라엘의 왕의 권세로도 그들을 압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들과 같은 몸, 같은 처지에 들어가시고, 함께 느끼고, 모든 것을 함께 겪으시면서 당신 자신을 서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하시는 방식은 철저히 구약의 약속대로 계시하셨습니다. 인자로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의 믿음은 아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 영광을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제 믿음을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아는 단계는 저 뒤에서 펼쳐집니다. 갈릴리 밤바다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21:2)

 

이렇게 우리의 믿음은 점점 자라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온갖 시험이 있고,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되면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리얼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믿음을 두고 헛된 자부심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미음은 자라가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풍성해야 합니다. 사고의 지적인 상태가 아니라, 연합의 형태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사귐이 있는 생생한 믿음으로 자라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초기 나다나엘의 믿음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아직은 충분히 관계되지도 못한 것 같은 상태로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자라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2. 혼인잔치의 문화적 배경과 중요성에 대하여

 

결혼식에서 일어난 일의 배경과 혼인잔치의 중요성과 문화적 맥락 나다나엘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을 것

 

2.1. 결혼식에서 일어난 일의 배경

 

예수께서는 40일 금식과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갈릴리로 오셔서 나다나엘을 비롯한 제자들을 부르셨으니,(1:43-51) 요한, 안드레, 시몬(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등 다섯 명의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 모두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들이었던 반면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사람이었습니다.(21:2) 5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사흘 째 되던 날(2:1)에 갈릴리 가나를 방문하셨습니다. 아마도 나다나엘의 집으로 예수님을 모셨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웃의 혼인잔치 집에 초대되어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나다나엘은 일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처음 빌립의 소개로 주님을 뵈었던 자리에서 그분의 큰 권세에 사로잡혀 느낀 그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데 혼인잔치에서 동료들과 함께 예수님의 영광을 목도한 것입니다.

 

2.2. 혼인잔치의 중요성과 문화적 맥락

 

그 혼인잔치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먼저 참석하였고, 잔치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장면은 아마도 마리아의 친척이었던 것 같습니다. 혼인잔치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종교적 예식으로 여길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일생 중에 가장 정결한 예식으로 여긴 것은 유대인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에서 혼인잔치로 자주 비유하셨을 것입니다.(22:10, 25:10) “어린양의 혼인잔치”(19:9)는 천국에 초대된 성도들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2.3. 나다나엘의 수준으로 보여주신 가르침

 

예수님의 첫 표적은 혼인잔치를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혼인잔치와 첫 표적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나 특히 나다나엘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기적이요, 어떤 의미가 담긴 기적이라는 사실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1:51) 이렇게 약속하신 것을 여기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혼인잔치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분을 믿었더라.”(2:11)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특히 인자로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의 경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아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깨달음과 순종을 보시며 우리의 수준에서 보여주시고, 아이의 손을 잡고 이끄는 부모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두고 자부심을 갖거나, 반대로 작은 믿음이라서 불평할 일도 아닙니다. 주님이 이끄십니다. 점점 자라가야 하지만 너무 늦다는 생각에 불평하지도 말자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끄십니다. 이 사실을 먼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주님을 점점 알아가고 때로는 주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더욱 믿음을 갖는 것을 추구합시다.” 믿음의 출발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주님을 따르던 나다나엘처럼 말입니다.

 

 

 

3. 본문해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2:3)

 

3.1.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 :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큰 불명예

 

이토록 중차대한 잔치에 다급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손님을 초대 해 놨는데 예상 외로 많은 사람이 참석했을 것입니다. 잔치가 한참 진행 중일 때,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고대 근동(近東)지방에서, 특히 유대인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는 대단히 중요한 음료입니다. 이런 날에 포도주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 잔치 중간에 포도주를 중단하게 되면, 하객(賀客)들에게 커다란 모욕이 될 수 있는 일로 봤습니다. 심지어는 당시에는 도덕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고 하객들 중에서 모욕을 받았다는 것으로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혼인잔치의 연회장과 주인집 사람들과 혼인잔치의 신랑은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3.2. 예수님의 어머니의 역할: 마리아가 예수님께 중재를 요청함.

 

이런 다급한 상황 속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런 사정을 알렸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홀어머니로서 맏아들과 함께 살면서 어떤 일이든 맏아들과 함께 상의하였을 것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집 하인들을 데리고 함께 혼인잔치를 돕는데 더 이상 포도주가 없는 것입니다. 당황한 하인들과 그 집 사람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머니 마리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심정으로, 다급하게 이런 사정을 아드님이었던 예수님께 알렸던 것입니다. 그 어떤 기적을 미리 기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상황을 알려서 안타까움을 전한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무엇인가 어떻게라도 도와야겠다는 심정, 그런 평범한 생각과 감정으로 아드님께 말했을 것입니다.

 

3.3. 수님의 반응에 대한 설명과 의미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

 

(예수님의 반응) :어머님의 평범한 말씀이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심정으로 그 상황이 다급하고 안타까운지라 맏아들 예수께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봐 줄 것을 요청한 것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대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 비교적 냉담한 대답으로 비쳐집니다. “여자여라는 호칭은 어머니라는 호칭과 대비되는 호칭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분명하게 여자여우리말로는 여사님이라는 호칭에 가깝습니다. 아무튼 매우 공적인 관계의 호칭으로, 이제는 사적 관계의 차원을 넘어선 호칭으로 어머님을 부르셨다는 데서 매우 인상 깊은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 장면이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항상 어머니로 호칭함)

 

심지어 아주 내담하게 그 안타까운 상황을 외면한 듯 말씀하셨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문에서는 나와 어머니에게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의미를 완벽하게 해설할 수는 없습니다만,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최소한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 상황을 냉정하게 외면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곧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과 또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교적 냉정하게 말씀을 하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모두가 현장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들에게 무엇을 시키시든지 그 시키시는 대로하라.”

 

(그 심오한 말씀의 의미) : 그러면 이제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어떤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사건 보다 예전에 있었던 기록을 복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 예수가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을 마음에 새겨두었던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2:41-51) 당시 12상 아이 예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비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본문에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대답입니다. 그 대답을 어머니 마리아는 마음에 새겨두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세월은 많이 흘렀습니다.

 

오늘 이 잔치 집에서 당황스러운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어머니로서는 맏아들과 상의하는 것 자체는 너무도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냉담한 대답은 매우 심오한 의미가 담긴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후 문맥과 요한복음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이 시기는 큰 전환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적인 생활에서, 이제는 몇 개월간에 광야의 금식과 시험 당하심, 세례 받으심, 제자들을 부르심 등으로 이어지는 큰 전환기의 순간을 지나고 계셨습니다. 사적인 생애를 접고, 공적인 생애로 접어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이미 예수님은 메시아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님여사님으로 부르게 된 것이며, 사적인 혼인잔치를 돕는 인간의 덕행으로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인간적인 차원으로 일하실 사역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나다나엘의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그렇게 들어내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인자로 공생애 사역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메시아 사명을 철저히 수행하시되 언제나 인자로 낮아지신 자세로, 그런 낮추시는 태도로 사람들을 섬기시고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이 아니라 메시아의 사명과 관련이 있는 심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이제는 메시야의 직무를 행하고 권능을 나타낼 그때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메시아의 직무와 권능을 행할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메시아의 직무 차원에서 내가 아무 말도 않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혼인잔치 집을 생각하시는데, 사실 그것은 어머니의 인간적인 덕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메시아의 직무인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이룰 일로는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덕은 인간적인 아름다운 심정에서 나왔을지라도, 그것으로써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나라에 상관 없는 일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석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편 나다나엘과 제자들에게 이 광경은 매우 인상 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수십 년 후에 제자들은 이 일을 회고했을 것입니다. , 그 때 혼인잔치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의미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구나! 주님은 당시에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결단의 시간이었을까?!” 복음서는 그런 맥락으로 수십 년 후에 기록하게 됩니다.

 

3.4. 기적의 발생 : 포도주로 변한 기적의 상황과 이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적과 그리스도의 표적은 항상, 자연법칙을 가르고 들어와 매우 권세 있는 표적을 나타내고,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볼 수 있는 자들에게만 그 표적에 부합한 의미로 작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그 표적이 매우 실효성 있게 역사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집에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결례(종교적인 의식)를 위해 항아리에 많은 물을 담아 둡니다. 사람들이 밖에 나갔다 와서 손도 씻고, 발도 씻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늘 맑고 깨끗한 물을 항아리에 담아 둡니다. 결례이니까 더러운 물에 씻는 것은 아닙니다. 결례를 따라서 두는 돌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는데, 보통 항아리 하나가 두세 통이 넘는 물을 담을 만합니다. 그런 물을 비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7-8) 주님은 그러니까 별다르게 특별한 일이 없습니다. 그냥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이 항아리 가득히 물을 채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이 극상품 포도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연회장도 알지 못한 사이에 아무 만족스러운 음료가 된 것입니다. 혼인잔치는 풍성한 대접으로 마칠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면밀하게 봐야 합니다. 이 표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른 결과는 크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큰 감동과 믿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 이 표적은 결국 메사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적이었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과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그 약속을 혼인잔치에서 성취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메시아의 영광을 나타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좀 더 강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4.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4.1. 당시 자자들의 믿음

 

이 때 제자들의 믿음은 무엇일까?” 아직 제자들은 이제 막 출발하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충만한 지식은 없습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역사도 알지 못했습니다. 승천하신 메시아의 위대한 역사도 모르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이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 혼인잔치 집에서 발생한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여 주심으로써 매우 큰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 당신의 개인적인 영광을 사람들에게 자랑꺼리로 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볼 때, 선생님에게 아직 희미하게 비치는 빛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혼인잔치를 흥분시켜 들뜨지 않게 정돈하시듯이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당신의 권세를 나타내셔서 제자들에게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작은 믿음을 싹트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은 매우 적절한 방식이었습니다. “인자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즉 나다나엘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이스라엘의 왕의 권세를 들어내지 않으신 방식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너무 신비롭게 하나님의 아들로 갑자기 크게 들어내지 않으셔서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시고, 너무 갑자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강조하여 나타내지 않으셔서 유대인의 그릇된 메시아사상으로 제자들이 빠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4.2. 오늘 우리들의 믿음

 

오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온전한 믿음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는 아직 나다나엘과 같이 이제 막 출발하는 믿음일 수 있습니다. 처음 출발점에서 이제 몇 걸음으로 시작된 믿음은 일반적으로,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형성된 관계로 출발하는 믿음입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충만한 권세를 다 아는 믿음은 아닙니다. 만약 그런 차원으로 출발하게 되면 바울이 처음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먼 상태로 갑자기 급변하는 것처럼 엄청난 상황이 올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상황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도, 우리 사회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각각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막 출발하는 믿음, 조금 더 성숙한 믿음,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알고 누리는 믿음, 등등 각각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차원을 성장을 우리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도 못한 믿음이라 생각 된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처음엔 참으로 많은 유혹과 시험이 찾아드는 믿음의 과정을 지납니다. 그것은 정말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원리는 자신의 믿음을 보라보면서 자부심을 갖거나, 낙심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믿음의 원리는 부족한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점점 알아가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4.3. 신앙고백의 방향성과 성장하는 믿음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나다나엘의 이 고백은 매우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일 것입니다.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 이런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주 뚜렷한 신앙고백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선생님과 제자로 시작한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은 점점 자라면서 수많은 역경과 시험을 이기며 상장해 갑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그 제자들마저도 다 도망쳤습니다. 그런 광경은 사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을 두고 실망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보고 있는 것이고, 자신의 신앙에서 일종의 자부심을 갖고자 하는 유혹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12:2) 히브리서의 가르침은 진정한 믿음의 원리입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믿음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즉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서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날마다 우리를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언제나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마음과 우리 교회와 가정과 삶의 전반에서 보리 수 있도록 보내주신 성령의 감동 감화로 살게 하셨습니다. 지금 그런 믿음의 생활로 나다나엘처럼 자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1:51)

 

이렇게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기록하여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주셨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 가운데 낮아지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인자로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면서 믿음이 자라가고,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훈련을 날마다 계속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삶의 여정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지극히 소박한 일로부터 큰 사명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권세와 자비하심에 맡겨드림으로써 그분의 성취요, 우리의 믿음의 열매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 모든 일들을 맡겨 드리면서 동시에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렵고 고통스럽고 극한적인 일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당황스러운 일이나, 어려운 일, 지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68:19)

 

또 한편 초기 나다나엘의 믿음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어린 시절을 지나고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지라도 주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 믿음의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지적인 채워짐만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게 되는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으로 점점 성장해야 합니다. 날마다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로서 아름다운 사귐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17:3)이 영생이라 하셨습니다. 그분과의 연합과 사귐으로 성장해 가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