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요6장52-59절 주전20250302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요6:52-59)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이 일종의 종교적인 방황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방황하게 되었는가?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뜻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신앙의 중심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 믿음의 중심에 담겨지기를 바랍니다.
1. 인생은 왜 방황하는가?
1.1 찾아온 사람들은 왜 다시 “표적”을 찾는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여주신 다음 날 입니다. 가버나움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한 순간의 강렬한 기대가 식은 것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만의 왕으로 옹립하려던 뜻이 꺾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 직을 거부한 예수께 대한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벳새다의 들판에서 보여주신 오병이어의 표적은 분명 이스라엘의 왕이기에 충분했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믿고 받아들여진 모세오경에서 장차오실 “그 선지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께로 집중되고, 확신했습니다.(그 성격과 방향은 다르지만). 비록 예수께서 거절했지만, 어제의 놀라운 장면은 깊은 의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버나움까지 찾아왔습니다. 자신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보고 받아들여지고 믿어지게 할 “표적”이나 “가르침”을 달라는 것입니다.(6:30절)
예수께서 명료하게 대답하셨습니다.(26절)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정확하게 표적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제대로 이해서 그릇되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사도들까지도 그랬으르 것입니다. 아무튼 “오병이어의 표적”에 담긴 본질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생을 위한 떡을 주신다.”는 표적입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직접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1.2. 떡을 먹은 까닭으로 믿음의 대상을 찾는 어리석음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해된 생각으로 “그 선지자”일거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참되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죠. “유대주의 사상”에 나사렛 예수를 붙잡아 두려고 했을 뿐입니다. 결국 “유대주의 사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에는 큰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모세오경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는 선지자였습니다. 바로 “그 선지자”는 신18:15절에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그 선지자”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이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유대주의 사상에서는 “그 선지자”는 유대나라의 육적인 왕으로 오실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현 시점에서 자신들을 위하여 다스려주실 것으로 확신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본 순간, “그 선지자”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선지자”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선지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더욱 큰 의문을 품고, 방황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유대주의 사상에 젖어 오류에 빠진 것처럼 오류에 빠진 신앙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과 본질적으로 다른 신앙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성경 계시 중심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만의 “믿음의 대상”을 찾아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의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그 모든 오류에 빠진 상태는, 그들이 스스로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주의 독립국가”가 최우선입니다. 자신들의 번영이 최우선입니다. 이방인들을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고, 선택된 자신들만이 번영을 누리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소원은 유대주의 자주독립, 유대의 번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 소망을 현실화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도 삶에서 이런 언제나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는 일들은 대부분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참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의문이 깊어지고, 반감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가르침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믿음의 대상”을 상상하고, 찾게 됩니다. 그런 상상 속에서 가장 절적한 “믿음의 대상”을 붙잡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삼위 하나님도 자신들만의 상상 속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성취해 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영원히 만족될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황을 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아주 명쾌하게 지적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명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
“떡을 먹은 까닭”으로 신앙생활 하는 모든 오류와 싸워야 할 것입니다. 아주 명쾌한 주님의 지적입니다.
1.3. 먹고 마시는 방식의 믿음의 대상,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저들이 찾아야 할 대상을, “먹고 마시는 양식”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유대인의 그릇된 신앙생활을 그릇된 소원 성취의 신앙으로 확실하게 규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을 “먹고 마시는 대상”으로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공동체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은, 만나 자체가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떡”은 만나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당신 자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2절)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6:35)
이 떡은 사람이 반드시 먹어야 할 대상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내에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궁핍을 해결하시는 메시아의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찾고 추구해야 할 대상이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예수님 자신이라고 명료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찾는 대상은 사실상은 육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뿐입니다. 자신들의 육적인 소원일 뿐입니다. 정치적인 문제이든, 국가의 자주독립과 번영이든, 그것들은 모두 육적인 소원 성취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광야의 만나를 주신 궁극적인 뜻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주신 오병이어의 먹거리도 모두 궁극적으로 “영생의 떡”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실 분은 오직 나사렛 예수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6:51)
주님을 영접하는 길은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믿음의 대상”을 “먹음의 대상”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믿음의 대상”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비시켜 비유(比喩)로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먹음의 대상, 마심의 대상”으로 비유(比喩)하셨습니다. 어려운 비유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명백한 비유입니다.
결론적으로 “인생은 왜 방황합니까?” 사람들은 “먹음과 마심의 대상”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신뢰합니다. 그 소원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방황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전형적인 표본입니다. 인생의 방황을 끝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1. 어리석은 신앙과 추구하는 것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어려운 말씀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욕망과 소원”이 절대적인 그들만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보다는 사실상 “분노하게 만든 말”로 여겼습니다.(52절) 그들은 자신들이 육적인 욕망으로 찾아다니는 믿음의 대상, 하나님까지도 육적인 욕망을 위하여 찾아다녔습니다. 사실을 부끄러워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그 욕망이 대인적인 육신의 욕망이든 국가적인 공동체의 하나가 된 소원이든 그 모든 것들은 사실상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시는 메시아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욕구와 소원만을 쫒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합니다.
2.2. 믿음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신 뜻
주님의 말씀은 더욱 심각할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생명의 떡”인, 자신을 먹고 마시는 것을 아주 리얼하게 표현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아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여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때문에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던 것을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던 조상을 상상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먹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짐승의 피도 먹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유치한 말장난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호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의 먹고 마시는, 기초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방황하고 있는 것을 치명적으로 찌르는 말씀입니다. 그 모든 방황은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 붙잡혀 있을 뿐입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을 찾지도 않은 유대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 4가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❶첫째, 유대인의 방황을 현실적으로 지적하십니다. ❷둘째, 주님은 희생 제물로 드려질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 ❸셋째, “살과 피”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관용구: “살과 피”는 그 사람 전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❹넷째, ‘인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죽으심으로써 죽으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2.3.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비유하는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40절과 54절을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54)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믿음”과 “먹고 마시는 일”로 대비시켜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당신 자신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추구해야 할 참된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은 참된 양식입니다. 모든 인생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궁핍과 목마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떡을 먹기 위하여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헛된 소원을 걷어내고, 영혼의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듣고 배워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생활과 마음이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진실로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진리를 믿고, 지속적으로 신뢰하며 사모합시다. 그 믿음의 원리가 56절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는 주님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주십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떡과 물을 마시는 것처럼 생생하게 영생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사죄의 은총으로 죄책과 형벌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우리 영혼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을 그 기초에 둡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자로 내려오셔서 죽기까지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사실은 변함없는 진리요, 믿음의 내용에 중심에 있습니다.
“인자로 오신 주님의 핵심사역”(헤르만 바빙크 저서에서 인용함)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없었고, 오로지 분열과 다툼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독생자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탕자의 처지였을 뿐입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죄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죄책”(정죄와 형벌적인 죄책)이 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정한 상태였습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우리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살과 피를 취하셔서 (1)(육체적인 의미에서) 우리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2)법적인 의미와 (3)윤리적인(도덕적인) 의미에서도 우리의 죄와 죽음과의 교제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서야 할 자리에 대신 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있는 관계” 속으로 그분은 자기 자신을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책”과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형벌”을 친히 담당하여 짊어지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정죄되셔서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고후5:21)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죗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하여“ 그분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갈3:13) 그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사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하여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고후5:15)
이것이야말로 “구원의 신비”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고난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하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신적인 사랑이 과연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도 충분히 계산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를 구태여 다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됩니다. 그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그분의 구원을 높이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라.”(롬8: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