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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우리의 변명(辨明)들이 무너지는가?

인천열린 2023. 2. 16. 08:56

요일 4장 19-21 어떻게 우리의 변명(辨明)들이 무너지는가?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장 19-21)


들어가는 말


구구한 우리의 변명(辨明)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없었던 모든 변명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형제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이유들과 여러 변명들을 부끄럽게 하는 강력한 힘이 하나님 사랑에 있습니다. 내가 왜 그 형제를 사랑할 수 없었는지, 내가 왜 그 이웃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 모든 변명을, 그때마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태양처럼 큰 빛을 낼 때마다 사랑이라 할 것도 없는 “우리의 사랑함”은 태양빛에 사라지는 별빛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변명을 부끄럽게 하나?


1.1. “우리의 사랑함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일종의 교리적 논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본문, 19절) 본문은 요일 4:17절부터 이어져 오는 형제 사랑이라는 주제의 결론입니다. 먼저 사도는 “우리의 사랑함”을 교리적으로 요약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일 4:10절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절 하) 사도는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삼위-하나님 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16)는 말씀도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빛나고 위대하게 계시된 속성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1.2. 우리의 그 어떤 변명까지도 부끄럽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떠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사랑해 줄 만한 그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우리에게서 근거한 사랑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자신의 속성적인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영원한 사랑”에 의해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변명, 즉 형제를 사랑할 수 없게 했던, 그 형제의 결점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우리 자신을 더욱 부끄럽게 합니다.


1.3. 사랑하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 안에도 사랑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죄와 비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고, 우리 안에도 “사랑”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빚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가족”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가족 관계로, 존재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빚으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성취된 결과입니다.


1.4. 사랑해야 할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삶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에 따라서 우리를 다루셨습니다.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은 무엇입니까? 창조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또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만드셨으니 마땅한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요일 4:17절에서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즉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은 “그 사랑이 있느냐?”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장점이 있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사랑”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삶과 모든 행위에서 사랑을 나타내는가?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2. 어떻게 하나님 사랑과 형제사랑이 하나일까?


2.1. 상식과 실천의 차원에서도 변명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

요일 4:20-21절은 상식적이며 실천적인 논증으로 우리를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주장합니다. 요일 4: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21절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권면하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적으로는 형제를 미워하는 그 어떤 사람을 여기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입니다. 아주 강한 어투를 사용했습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실천적으로 나아가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2.2.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관계

2.2.1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때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이다.

우리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는 죄가 있고,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도의 주장에 의하면 형제 사랑이 없으면 곧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너무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때에도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있으니,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변명하는 그 어떤 이유도 하나님 사랑 앞에서는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희생시켜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2.2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또는 이웃사랑)은 항상 함께 있음

또 어떤 사람은 본문을 근거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로 나아간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주장은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억지스러운 추론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 사랑”이 곧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을 갖춰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사랑을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으로써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 두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을 했으니 그다음의 사랑이 이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랑은 항상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못함의 그 어떤 변명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사랑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사랑함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 사랑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 22:37-40절에서 주님이 선언하신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 두 계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자신만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도 큰 관심을 갖고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에 우리는 관심을 두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첫 번째 요청인 “형제 사랑”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사랑의 속성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고, 아무리 형제를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형제 사랑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인도주의적 형제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들 중에서도 항상 그 사랑과 함께 있는 형제 사랑을 반드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2.2.3. 실천적인 사랑을 요구하심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요한은 실천적인 형태로 다시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항상 실천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사랑은 단지 감상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형제를 향한 사랑이나 항상 함께 동반되어야 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인생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웃과 형제를 향한 우리의 태도가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는, 곧 긍휼의 정신으로 형제를 향해 마음이 열리고 실천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본문은 감성적인 사랑을 말하지 않고 매우 실천적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마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십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점검하게 합니다. 어리석은 길로 빠지지 않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힘에서 나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고,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와 그분의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이 기독교인의 삶의 요체입니다. 그것을 가로막는 “형제를 미워함”이 우리 자신에게서 제거해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변명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엎드려 그것을 두고 회개하는 이 순간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던 수많은 단단한 이유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뒹굴고 있는 것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