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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싸워야 할 '세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천열린 2023. 2. 24. 11:42

“4. (왜냐하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장 4-5절)
 
 

 

들어가는 말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있는가? 율법에 대해 오해되고 왜곡된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의해 오히려 점령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러면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 싸워야 할 “세상”이란 무엇일까?
  
 

1. 사랑은 계명을 즐거이 지키게 한다.(3)

 
요일 5:3절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라고” 사도가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듭난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지 않게”여기며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순종이 무겁지 않게 외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명까지도 사랑하게 되어 생겨난 현상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계명을 즐겁게 지키는 것이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인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는 능력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2. 계명과 그리스도인의 관계

 
율법(또는 계명)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서 논쟁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문제였습니다. 어떤 문제들이 있습니까?
 
 
2.1. 어떤 이들은 계명에 집착함으로써 율법주의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도 계명을 “율법주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그 율법의 속박 아래 가두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에 이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이와 관련되어 있고, 히브리서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율법의 행위에 집착하는 경향입니다. 자신의 율법의 순종, 그런 행위로 의로우신 하나님께 인정받게 된다는 비성경적인 의도가 개입 된 결과입니다. 모든 인간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고, 단 한 사람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자들로 타락한 것입니다. 완전하고 영원하며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집착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의도로 율법에 집착하면 오히려 율법에 사로잡혀 율법 아래 지배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비참한 결과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율법을 순종하지만 자신이 다 순종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은혜가 필요한 자신을 인식합니다. 계명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하며, 특히 우리는 율법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가볍게 여기는 ‘종교적 오만함’은 자신의 순종을 하나님 앞에 내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오류와 유혹을 주의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계명을 순종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전하지 못한 순종을 늘 죄송스러운 태도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우리의 부끄러운 것들을 씻겨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율법주의적인 유혹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도 일종의 ‘세상’입니다.
 
 
2.2. 또 다른 위험은 율법 폐기론이라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성적으로 깨달았다는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삶의 활력"을 위한다는 빌미로 율법을 폐기시키고, 방종의 길로 나아가는 심각한 오류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복음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은 이제 필요 없고, 율법과 절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유로운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덕법을 버린 방종하는 자들입니다. 방종의 삶을 살게 되어 매우 극심한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의 자유를 오해한 결과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자유는 "죄와 죄의 세력, 사망과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도덕법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명을 순종합니다!
 
 
2.3.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도 도덕법을 명령하십니다.
 
요한 사도는 계명을 순종하는 문제를 실천적으로 경험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존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이며, 마땅히 그분의 계명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계명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며, 수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런 계명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명령된 엄중한 계명입니다.
 
 
2.4. 계명을 두고 신자와 자연인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과 자연인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이 무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이 무겁지 않습니다. 즐겁고 기꺼이 지켜가며 순종하게 됩니다.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정죄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로 율법의 정죄와 죄의 절대적인 지배로부터도 자유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에 최선을 다하여 순종합니다. 완전한 자는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를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자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그분 앞에 엎드리는 태도를 잃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게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자연인(비 그리스도인)에게는 계명들이 매우 무겁습니다. 그들에게 무거운 멍에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주도하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계명이 항상 달갑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죄의 세력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고, 그 죄는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언제나 싫은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세상이라는 실체

 
본문은 믿는 자들이 “세상을 이긴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육신의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락과 죄의 결과로 추잡하고, 무서운 것들로 남아 있는 그 무엇입니다. 요일 2장16-17절입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3.1.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세상에 대해서
 
3.1.1. ‘자아와 그 속에 내포된 모든 것들
 
“교만(驕慢)”은 인간의 자아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정반대가 되는 실체입니다. 무엇으로 교만한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아를 우쭐하게 하는 외모, 능력, 삶의 형편, 성공 등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자만(自滿)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세력입니다. 이 세력은 주님의 마음에 있는 “온유와 겸손”의 정 반대의 세력입니다.
 
이 세력은 칭찬받기를 원하는 욕망과 비판받기를 싫어합니다. 그것은 또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인간의 위대성에 대해 사람들은 얼마나 안달하며 주장을 펴는지 모릅니다. 무가치한 인간의 야망이 생겨나고, 성공하려고 욕망이 일어납니다. 우리 속에 세상에 해당되는 그것들이 나를 주장할 때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계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 이런 것들을 이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실체를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하고 자신 안에서 밝혀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입니다.
 
 
3.1.2. 세상은 곧 육신이라는 차원으로도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육신이란 성욕, 정욕, 탐욕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면에 생겨나는 "세상"입니다. 사람은 혼자 있다가도 갑자기 악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육신이요, 세상입니다. 세상은 육신과 마음의 욕망입니다. 그것도 세상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또 싸워야 할 것은 “불충성”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나태함”"입니다. 경건한 삶을 무시하고 “안일함”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런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경을 읽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는 마음에 이런 일을 수많은 방향으로 흘러나옵니다. 거룩한 일에 참여하는 일에는 걸림과 그에 뒤따르는 온갖 변명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육신의 정욕을 향하여 갈 때는 걸림이 없습니다.
 
 
3.1.3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믿음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요한은 이 용어를 두 구절에서 3번 사용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전혀 새로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이런 지위에 놓여 있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도 세상을 이기는 중에 있습니다. 현재적으로 죄와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사단의 나라가 보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리스도인이여! 세상을 경계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리스도인이 넘어지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자신 안에 있는 옛사람으로부터 어떤 것들이 그들을 넘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이라는 실체입니다. 옛사람의 잔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승리했지만 아직은 완전한 끝이 아닙니다. 그들은 때로 시험을 당하기도 합니다. 낙심과 좌절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한 승리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최후의 날, 하나님의 영광의 존전에 흠없이 드려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