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고백서 교리문답

우리는 왜 위로가 필요한가?

by 인천열린 2023. 5. 14.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01 (1-2문답)

 

우리는 왜 위로가 필요한가?

 

1: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답 : 사나 죽으나1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2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3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치러주셨고4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5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6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7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8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9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10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2: 이러한 기쁜 위안 속에서 살고 죽기 위하여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의 죄와 그 비참이 얼마나 심각하며11 둘째 어떻게 그 죄와 비참에서 벗어나며12 셋째 어떻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인가 하는 일입니다.13
 
---------
1)로마서 14:7-9 2)고린도전서 6:19-20 3)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4)베드로전서 1:18-19; 요한일서 1:7-9; 2:2 5)요한복음 8:34-36; 히브리서 2:14-15 ; 요한일서 3:1-11 6)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21:16-18 7)요한복음 6:39-40; 10:27-30; 데살로니가후서 3:3; 베드로전서1:5 8)로마서 8:28 9)로마서 8:15-16; 고린도후서 1:21-22; 5:5; 에베소서 1:13-14 10)로마서 8:1-17 11)로마서 3:9-10; 요한일서 1:10 12)요한복음 17:3; 사도행전 4:12; 10:43 13)마태복음 5:16; 로마서 6:13; 에베소서 5:8-10; 디모데후서 2:15; 베드로전서 2:9-10

 
 

들어가는 말

 
129개 문답으로 이뤄진 교리문답입니다. 왜 위로(慰勞)의 문제를 먼저 거론했을까요? 우리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견고한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하신 이유도 그렇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배우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그 영원한 위로의 골자는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 하는 것이며,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그분이 우리를 영원토록 구원하시고 우리를 보살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위로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는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이 위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그렇다면 위로란 무엇입니까?
2. 그 위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3. 어째서 오직 그것만이 견고하고 확실합니까? 
4. 그런데 왜 그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5. 그 위로를 얻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합니까?
 

. 위로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가 빌1:21절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이 확실하고 견고한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슬프고 억울한 일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그 무엇이 상실되거나 깨어진 상태로 타락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상태요, 하나님과 철저히 원수지간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악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악한 상태가 인간과 피조 세계에 만연한 것입니다.
 
그 악한 상태가 바로 인간이 누구나 '죄와 비참함'의 상태인 것입니다. 사람은 왜 누구나 다 고통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죄와 비참함'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그것이 곧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비참함을 누그러뜨리거나, 우리에게 인내할 수 있도록 해 줘어야만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스스로 씻어낼 수 없고, 그것이 자신 안에서와 온 세상에서 발전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인간의 전적인 무능'이라 말합니다. 우리 스스로 '죄와 비참함'을 극복하여 온전한 행복을 찾을 수 없고, 그 영원한 행복을 갈망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와 비참함'을 씻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와 비참함'에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비참함'보다도 훨씬 크고 확실한 해결책이 있어야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죄와 영원한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회복이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영원한 죽음'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선'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나름 그 '최고선'을 찾아 살아가지만 스스로는 찾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무튼 "죄와 영원한 죽음"을 넘어설 수 있어야만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비참한 인생에게 그 해결책을 계시하여 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나타내 주지 않으신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 첫 문답에서 이것을 문답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 1문답의 답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다음 7 가지의 인생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❶어떤 사람들은 "인생은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말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집중할 뿐입니다. 즐기는 것이 인생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쾌락주의자들입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쾌락주의에 빠져 삽니다. ❷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잘 견디자." 라고 말합니다. 끝까지 참아내는 것, 자신을 절제하고 통제하여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빛낸다고 봅니다. 꿋꿋하게 참아내고 견디는 것을 인생의 가치관으로 삼은 것입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❸인생에 냉소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소망이 무너지는 곳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봤자 뭐해, 다 쓸데없어" 라는 식입니다. 냉소주의자들입니다. ❹신비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삶과 삶의 모든 불행은 결국 자신의 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몸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고, 몸에서 벗어남으로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죽이는 일에 힘씁니다. 세상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합니다. 수동적으로 삽니다. 온전히 수동적으로 삽니다. ❺보통의 인생관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하는 일과 가정에 충실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종종 그런 것 자체가 삶이 되어 버린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을 상실하면 삶과 세계 전체가 무너져 버립니다.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만 잃어도 삶의 토대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❻인본주의 인생관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생을 선을 행할 기회로 봅니다. 세상을 개선하고 세상의 상태를 향상시킬 기회를 인생으로 봅니다. ❼종교적인 인생관도 있습니다. 단지 종교를 가지고 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 생각합니다. 성직자들이 가장 위험한 부분입니다.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면, 죽을 만큼 허무하게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인생관입니다. 삶이 그 일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 출처: 로이드 존스의 빌립보서 강해 -

 
  인간의 철학과 윤리적 덕성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떤 자들의 소리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들이 일시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지는 몰라도 결국 모두 사라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휘말려 빠져 있는 '죄와 영원한 죽음'의 비참한 현실, 그리고 그 비참의 근원을 들춰내 밝혀주고, 거기로부터 우리를 도피시켜 줄 유일한 피난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제시하여 주는 것이 본 교리문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성경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위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 교리문답이 '위로'를 먼저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도 영원히 견고한 위로
 
오직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죄를 씻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믿음은 이 확신과 위로를 영생과 함께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위로는 성령께서 복음으로 우리 마음에 심어줌으로써 이뤄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게 된 은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영원토록 구원받은 자들임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 그 위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입니다. 즉 우리가 자유를 잃은 노예로서의 소유물과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전에 우리는 마귀와 세상의 소유였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그분의 영원한 구속과 그분의 보살핌 속에 있다는 의모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2. 그 화목의 방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즉, 대속의 죽음)를 통한 것입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으로 죄 값을 보상하셨습니다.(벧전1:18, 요일1:7) 우리가 죄와 사망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히2;14, 요일3;8)
 
 
3.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은혜를 보존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감찰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악들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로의 골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화목 되었으므로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구원받았으며, 성령과 영생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 어째서 오직 이 위로만이 견고합니까?

 
그 위로만이 견고하다는 것은 첫째로, 오직 그것만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롬8:35) 라고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오직 그것만이 사단의 온갖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극심하고 위험한 갈등 속에서도 우리의 위로가 흔들리지 않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와 그분이 베푸시는 모든 은혜들이 나에게도 해당된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 어째서 이런 위로가 필요합니까?

 
이제 이 위로가 우리게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들어났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온갖 유혹과 갈등 속에서도 낙망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위함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도 이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와 내세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며, 다시 절망 속에 빠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견고한 위로와 더불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과 성도의 견인은 곧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십니다.
 
하지만 단순히 성도의 구원 자체만으로는 최종적인 목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이 위로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이 위로는 '구원의 목적'과 '창조의 목적'에 맞닿아 있습니다.
 
 

. 그 위로를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에 대하여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2문에서 말합니다.

2문 : 이러한 기쁜 위안 속에서 살고 죽기 위하여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의 죄와 그 비참이 얼마나 심각하며. 둘째 어떻게 그 죄와 비참에서 벗어나며, 셋째 어떻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인가 하는 일입니다.

 
이 질문은 교리문답 전체의 진술과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교리문답 전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제3문-제11문에서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제 3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서 안다는 것은 제4-11문에서 배웁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우리는 결코 못 지키며, 더욱 어기기만 합니다.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제12문-제85문입니다.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제 12문에서 배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안 되고 중보자를 찾아야만 합니다.(제13-14문). 중보자는 누구입니까?(제15-19문) 중보자가 인류를 구원하는데, 참된 믿음으로 연합되어 그 모든 은택을 받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습니다.(제20문)
 
그렇다면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신뢰를 말합니다. 우선 그 지식은 사도신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제22-64문). 그 신앙 지식은 의를 얻게 하고,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는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집니다.(제59-64문)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설교와 성례와 권징으로 선물하여 주십니다.(제65-85문) 복음의 강해로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고, 성례의 시행으로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며(제66-82문), 권징(제83-85문) 교회를 성결케 보존하십니다.
 
셋째,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제86-129문)
 
감사의 삶은 회개와 기도입니다.(제86-87문) 회개란?(제88-115문)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율법을 따라 <선함>을 발산하며 사는 것입니다.(제91-115문) 믿음의 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순종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기도란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주기도문에 담겨 있습니다.(제119-129문)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3문-11문 인류의 타락과 결과) 둘째, 너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12-85문,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86-129문,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위로 #죄 #비참함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1 #살든지죽든지 #최고선 #인생관 #쾌락주의 #인도주의 #스토아주의 #종교습관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