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무엇이 주님의 심판을 불러왔는가?

by 인천열린 2023. 2. 5.

마11장 20-24절 주전230205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가장 받아들이지 않는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 심판의 의미와 이유를 들어봅시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삽시다. 여러분...


1. 사람들의 요구와 그리스도의 복음의 충돌

1.1. 유대인과 주님의 심판개념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뚜렷한 메시지와 함께 메시아의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마11:4-6) 여러 표적들은 메시아의 결정적 표증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11:5)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문은 무엇입니까? 메시아로 오셨다는 예수께서 아직도 육적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사람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긍휼의 사역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메시아로 오셨다는 예수님이 말하는 심판의 성격이 자신들과 달랐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큰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문으로 남지 않고 유대 사회에 어떤 큰 파장을 일으킨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관점이 오늘날에도 아주 팽배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며 살았느냐?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너희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한 심판의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원수에 대한 일종의 앙갚음이 심판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진술과 주님의 말씀은 저들과 달랐습니다. 그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불러들이는, 이 회개를 촉구하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심판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1.2. 광야에 찾아간 유대인들의 이유?

종교 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에게 세례 요한의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 찾아간 이유가 뭐였냐고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더냐?"(7)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메시아를 예비하는 사역"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것은 곧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육적 이스라엘의 해방과 원수에 대한 앙갚음이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이유가 아니라는 말씀이 주님의 메시지 골자입니다. 이미 너희에게 세례 요한 때로부터 이미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집중했던 것은 바로 그 메시아를 예비하는 회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복음에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문제의 핵심입니다.


1.3. 분노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저들에게 “너희는 눈길, 너희 관심을 메시아인 나에게 돌리라.” 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이 땅에 왔으니, 세례 요한의 외침의 핵심이 곧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집중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전히 육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온갖 육적인 문제 해결에 너희 마음을 빼앗기고 있구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작 너희가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어찌하여 외면하느냐?” “그래서야 되겠느냐?” 여전히 종교적의 열심만으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육적인 것들이니 참으로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너희를 향하여 진노하신다는 사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것을 개탄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돌아오라! 지금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든지 세례 요한으로부터 지금까지(12절) 천국은 침노를 당하듯이 나의 이 복음에 진실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천국에 침략하여 들어오듯이 강력한 역사가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이제는 알아들어야 할 것인데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유대의 복음전도 현장이 주님의 서글픈 현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장터에서 "상여놀이""결혼식 놀이"로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자신들의 관심과 자신들의 놀이와 요구 사항에 응해달라는 것이 저들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이요, "이 땅에서 자신들의 욕망에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태도가 그들의 심판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1.4.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이 척박한 땅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여기까지 세월은 흘러왔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선포되는 가운데서도 많은 세월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요구만을 앞세웠습니다. 자신들의 문제, 자신들의 요구 사항만이 하나님 앞에 높이 쌓아올렸습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내려놓았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는 반응하지 않고, 종교적 겉모습과 자기 자신이 신앙생활의 이유가 되어버린 상태를 돌이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여전히 세상과 다름없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들어낸 것입니다. 여전이 이 세상이라는 장터에서 "상여놀이" "결혼놀이"에 심취 해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지금도 설교자도 교사들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버리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함께 이 땅에서 놀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도 우리 자신들을 위한 도움자일 뿐이며, 메시아도 우리의 욕구를 위하여 일 해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만을 위하여 역사해 달라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우리들 마음에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여전히 "육적 이스라엘"의 꿈을 꿈꾸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2. 주의 심판에 대한 경고, 성경의 경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리스도와의 관계


2.1. 역사와 자연의 질서 속에 두신 책임의식과 심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판의 교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봐도 심판의 선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심판이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관념에는 반드시 옳고 그름이 있습니다. 악한 것은 벌을 받아야 하고, 선한 것은 권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질서에서도 이 심판의 관념이 무너지면 사실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도시의 경찰력이나 공권력이 없으면 우리는 밖에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온갖 도적떼와 강도들이 거리를 활보할 것입니다. 공권력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단 하루도 조용하지 못합니다. 창조주께서 두신 질서와 공동체 안에 두신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이 세상에 온갖 질서를 두셨습니다. 특히 선과 악을 구별하고, 악은 징벌하고 선을 권장하는 관념을 일반적으로 품고 살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는 항상 일정한 기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는 책임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책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이처럼 심판이 엄연히 존재함을 하나님께서 항상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심판의식의 결여된 것은 자연 질서와 역사의식에도 맞지 않습니다.


2.2. 역사 속에 사는 우리는 책임 있는 존재

성경을 읽는 사람은 심판사상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너무도 심각하다는 것을 즉각 인식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에 맞는 우리의 위상, 그 지위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그 어떤 고귀한 지위에 있음을 항상 강조합니다. 즉 그에 맞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어떤 것을 요구하신다고 진술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상 이 땅에서 청지기와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합니다. 이 심판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도시와 민족들에게 다 적용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기서도 언급된 두로와 시돈은 이사야23, 26-28잘에 아주 길게 경고하고 심판을 예고된 것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3. 성경의 심판을 뺄 수 없다.

그러므로 심판은 엄연한 자연과 역사와 성경의 원리입니다. 심판 사상은 성경에서 빼버릴 수 없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빼어 버리면 성경의 기록은 남는 게 없습니다.

심판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 죄인들의 핑계에 불과합니다. 죄인들의 어리석은 생각일분입니다. 하나의 어리석은 핑계와 책임 회피적 반응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적 반응”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는 어떤 길로도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회피와 멸시는 결국 우리가 어린 아이처럼 유치한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선과 악의 구별이 뚜렷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선과 악이 뚜렷해야 합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공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의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는 몸부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양심에도 맞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2.4. 성경의 심판교리에는 뚜렷한 원칙들이 있습니다.

첫째, 그 첫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의 심판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특히 본문에서 심판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가버나움과 고라신, 벳새다에서 행하신 것은 주님의 권능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 소돔, 고모라와 비교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들의 예언들을 읽어보면 그 어떤 도시보다도 하나님의 심판을 크게 경고 받았습니다. 그 도시들은 불경스럽고, 하나님을 부도덕한 도시였습니다. 죄악된 생활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창세기 19장에 의하면 아주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가버나움과 고라신이 이런 구약의 도시들보다도 더 악하다고 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바로,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은 도덕적 타락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덕적 타락상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신 곳은 메시아의 나타나심을 보이신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가버나움은 주님이 이사 하셔서 친히 거주하신 도시였습니다. 주님의 복음전도의 전초기지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반응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가장 큰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태연하고 방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판의 근원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앞에 어떤 반응 보였느냐?” 이것입니다. 찬송가 147장에 “너 거기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맥락의 가사인 것 같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너 거기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반을 보였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의 줄기찬 외침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들을 때마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둘째, 성경의 심판 원칙 두 번째는 그 심판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세례 요한의 일관된 말씀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회개란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서, 그분에 대해서 듣고,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알고 난 다음에 인생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출발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질못 된 것을 돌이키는 생각과 움직여 돌이켜야 합니다. 실행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골고다 언덕으로 향해서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나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십자가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에게도 임할 것을 바라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겨드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려올 때,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여전히 세상의 인식대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어느 날에 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분에 의해서 외면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고라신과 벳새다에 화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최후의 날에 임할 것입니다. 가버나움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웠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가버나움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과 다름없는 기회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에게 행하신 주님의 권능이 얼마나 껐습니까? 놀라운 기적을 보았듯이 여러분의 삶에 들려지는 이 복음이 있기 까지 얼마나 많은 우려곡절과 방해와 걸림돌이 놓여 있었는지를 아십니까?

이 설교자도, 이 교회도 주님이 붙드십니다. 여러 상황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큰 표적이나 다름없는 역사로 인하여 우리가 여기에 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복음을 살아있는 생전에 들을 수 있는 기회만으로도 영광이며, 엄청난 복이지만 동시에 무서운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어디서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에 제대로 반응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예고된 대로 무서운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최후의 날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뵐 것입니다. 그 심판석에 우리 주님이 계실 것입니다. 그날에 여러분과 제가 감격과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나오도록 이제부터 주님 앞에 제대로 엎드려 나의 죄악을 회개하고 철저히 엎드립시다. 그리고 공의와 정의가 살아있는 삶을 구가합시다. 그날에 함께 주님 앞에서 그 영광을 누립시다,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주님으로부터 책망과 외면과 버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