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장25-27절 230212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 복음)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없나이다.)”
들어가는 말
본문은 사실 주님께서 기도의 형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 드리는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27절 끝 부분을 "없나이다."라고 읽어야 마땅합니다. 기도의 형식인 본문은 동시에 일종의 "선언"이요, 아버지의 뜻이 옳다는 것을 이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계시될 때, 어떤 이들이게는 가려지고, 어떤 이들에게는 나타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세밀하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에 따라 구별되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하십니다. 어떤 구별이 있습니까? 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자부하기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고, 또 한 편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린 아이들""어린아이들"로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것"으로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곧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반응과 태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1)(1) 왜 이렇게 서로 다른 반응과 태도를 보일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그 영광스러움과 존귀함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복음의 중대성
먼저 앞에서 기록하고 있는 본문을 되돌아보면 본문이 여기에 수록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1. 복음에 반응하는 세상에 대한 "주님의 선언"
마11장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넘어지는 문제를 다루어 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쭉 말씀하시다가 본문에 와서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하여 "논평"을 뛰어넘어 일종의 "선언"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두고 하시는 선언입니다.
"주님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을 두고 우리 주님도 "옳소이다."(26) "옳소이다."(26)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호응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행하신 일에 대해 주님의 생각에도 "옳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님을 적대시하고,, 세례 요한을 죽이고, 주님에게까지 적대감을 가지고 대항하는 것을 두고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큰 모욕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이 상당한 모욕과 치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모욕을 받으시는 중에도, 그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확신하셨다는 것입니다.
1.2. 세례 요한의 복음 선포를 거부하는 세상
마 11:7-10절에서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와 세례 요한의 회개를 선포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광야의 갈대를 보러 간 것도 아니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선지자를 찾아간 것도 아닌데, 결국 사람들은 선포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완고한 행태를 매우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복음은 사실상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지향하는 복음이었습니다. 메시아를 예비하는 복음 선포가 외면을 당한 것입니다. 만약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광야까지 찾아갔다면, 메시아를 예비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찾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기서 이미 이 세상은 자신의 완고한 마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적대감,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들러낸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1.3. 그런 중에도 천국의 큰 역사가 있음
하지만 12절에서 주님의 말씀에서 어떤 큰 위로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봅니다. "세례 요한 때로부터 주님에 이르는 때부터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됩니다. 복음이 선포 되면서 하나님 나라에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12절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은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데 그런 본격적인 역사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천국으로 쳐들어가 침략하듯이 들어오는 강력하게 역사하는, 힘 있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일이 이뤄지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을이 천국 복음을 멸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들을 찾아내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반을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어떤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 복음을 듣고 반응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일이요, 뜻하신 반응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일입니까? 사실 오늘 우리들의 구원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밝혀주시는 아주 중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찾으시고,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1.4. 세상이 심판에 받게 된 유일한 이유
아무리 큰 표적을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나타내 보여 주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했습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형벌이 심판 날에 임하게 될 것인지를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저 타락한 두로와 시돈이라는 항구도시" 보다 더욱 심각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을 선언하심으로써 형벌의 유일한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라신과 벳새다는 특별한 도덕적 타락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도 그렇습니다. 평범한 고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큰 심판을 받게 될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 했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결국 주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됩니까? 복음의 핵심, 복음의 중대성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이 복음 앞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최후의 날에 모든 인간은 일종의 인생결산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때에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 함으로써 사실상 만물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음을 선언 받게 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마11장은 그런 내용으로 진술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 11장은11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것이며, 그분을 소개한 세례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한 처사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결과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매우 중대한 복음의 핵심이 마태복음 11장에서 선언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복음이 가려진 사람과 나타내 주신 사람들
그러면 이제 주님이 구별하신 사람들은 두 부류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이들은 천국에 침략하듯이 그들이 천국으로 들어오는 강력한 역사가 이뤄지더라는 것입니다.
2.1. 복음이 가려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25상)
주님은 오늘 본문 24-27절에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먼저 주님은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어 말씀하십니다. 한 그룹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다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그룹은 "어린 아이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저들이 왜 기독교인 될 수 없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교만"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교만에 빠져 있는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확신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지혜만으로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그들이 교만하게 된 것입니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자신들은 이 세상의 지혜만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지혜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만족시키고 있으니 더이상 바랄 게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가려졌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되도록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말씀이고,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렇게 역사하신 것을 "옳소이다."라고 말씀 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시는 방식을 깊이 동감하셨던 것입니다.
2.2.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인생"을 자신들이 다 이해 한 것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입니다. 이 짧은 인생이 이토록 빠르게 흘러가는 중인데, 신속하게 흐르는 세월에 허덕이는 이 인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깁니다.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멸시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지식, 세상의 지혜와 인간의 철학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들"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을 "지혜롭다고나 "지혜롭다고나! 슬기롭다"슬기롭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남다른 지식이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보다도 슬기롭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는 자들이며, 확신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르침만으로 만족한다는 사람들이요, 인간 밖의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자들입니다. 즉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특징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마음에 하나님 두시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마 19:16-22절의, 관원이었던 자가 찾아왔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부자요, 젊은 시절에 관원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과 돈, 그리고 젊음으로 누리는 만족감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그것들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뛰어난 종교적 실천가였지만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겠다고 얼굴빛을 보이며, 주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의 지혜와 자신의 소유"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또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에게도 가을 땅에 낙엽처럼 떨어지는 날이 오는 것처럼 어는 순간이 도래합니다. 그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는 청년의 고백입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보통의 사람에 비하여 10배 이상으로 금상승하는 병에 걸렸답니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봐요, 청년, 이 세상은 돈으로 되지 않는 일일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 당신의 병이 그럴세!" 이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 매달렸답니다.. 아무튼 인생이 그렇습니다.
2.3. 복음을 나타내 보여주신 사람들
"어린아이들에게는."(25하)
여기서 어린 아이들로 묘사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문자적으로 이해 할 어린아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회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는 데 있어서 연령이 고려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나이에 제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에 반응하고 회심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외에도 회심을 경험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어린 아이들"은 무지하고 배움이 적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이 지적으로 어린 사람들도 아닙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어린아이들"이라는 말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과 대칭으로 쓰인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린 아이들""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주님께로 나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인생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매우 많은 학식과 전문가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은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인간이 아무리 배우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많은 것을 깨달아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지혜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특히 하나님의 복음에 반응하여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린 아이들""어린아이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과 적용
결국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무기력을 알고 엄마나 아빠에게, 또는 보호자에게 항상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단지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맡은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 항상 그들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함 신뢰를 품은 사람들입니다. 믿고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내가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성숙하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좀 더 성숙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항상 "복음이 감추어진 사람"과 "복음이 나타내 주심을 받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점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겸손"이라는 기준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분별하시고, 아주 예리하게 분별하여 적용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시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난 당신의 복음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모욕은 우리를 위한 대신 받으신 희생이요,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모욕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구속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 무한한 영광 가운데 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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