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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새벽설교 시리즈

빌립보서 새벽설교 22 (빌3:1) 우리는 어떻게 기뻐하는가?

by 인천열린 2023. 6. 22.

빌립보서 새벽설교 22

우리는 어떻게 기뻐하는가?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3:1)

 

1. 사도가 말하는 기쁨은 무엇인가?

  1.1. 빼앗기지 않는 기쁨

3:1-4:7까지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사도는 기뻐하라고 강조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기쁨을 빼앗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은 사도 자신이 투옥된 상태에서 말했습니다. 성도들에게 "낙담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투옥 된 것이 오히려 복음을 전파 하는데 있어서 더욱 활발해졌다는 것입니다. 제 2장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사도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기쁨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기쁨을 빼앗김 당하지 않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주안에서 기쁨

그런 다음 사도는 또 다시 여기 3:1절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끝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내에게는 수고롭지 않다. 오히려 너희를 안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3:1절은 이 서신의 중심 주제입니다. 동시에 사도가 되짚고 있는 내용입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2. 기독교의 참 기쁨을 3가지 방면으로 살펴봅니다. 

이런 권면은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①첫째, 주안에서 기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②둘째, 왜 주안에서 기뻐해야 하느가?  ③세 번째, 어떻게 주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입니다.

 

2.1. 첫째,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상태라는 관점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령 하듯이 말하는 것은 기쁨이 순전히 수동적이거나,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상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문득 기쁨이 생기기를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 기쁨에 대해서 알지 못함으로 혼란스럽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쁜 일이 생겨나야 기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뻐할 만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의 어떤 일들에 의해서 만들어내서 생겨나 기쁨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행복과 불행은 외부의 어떤 일들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은 이 문제를 자주 지적합니다. "우리는 외부의 어떤 사건에 의해서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기뻐해야 하고, 기뻐할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2.1.1 첫째,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을 직접 공략하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기쁜 감정을 만들어내는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시도는 코메디나 어떤 집회의 아이스브레크-타임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시도가 행복감을 위한 시도입니다. 이런 시도는 우리를 사교에 빠지는 경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도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주된 문제인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괴로움을 외면한 채,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찾아 인위적인 기쁨과 쾌락으로 끌고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 성경적인 시도입니다. 

 

2.1.2. , 밝고 유쾌하고 행복하게 보이려는 시도입니다.

또 한 편 항상 유쾌하고 행복하게 보이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행복한 척 함으로써 자신이 기독교인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으로 기쁜 척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여주기식 원리입니다. 이처럼 보여주는 기쁨은 결국 생생하거나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기계적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1.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됨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참된 기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참 기쁨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집중할 때 참된 기쁨을 소유하여 품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 영혼에 기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기뻐해야 한다는 하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확실한 기쁨의 증언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3.2. 이 기쁨으로 증언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 

주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 하라."(16:33) "담대하라"는 말씀은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주님이 보여 주시면서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특권은 이 세상의 상황과 환경에 상관 없이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은 그 기쁨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의 죄가 무엇이고,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고백과 이 삶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기뻐하라고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3.3.  왜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까?

먼저 그 이유는 우리가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독생자께서 이루신 구원입니다. 그 구원을 누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독교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의무요, 사명입니다. 구원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참된 기쁨을 세상에 알리는 것과 동일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덕과 영광을 선포하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벧전2:9) 이 특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최고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이기는 삶이요, 환란 속에서도 기뻐함으로써 승리를 외치는 방식입니다. 그 기쁨을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쁨은 가만히 앉아서 절로 생겨나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물론 인위적으로 기쁜 감정을 일으키는 방법은 더욱 나쁜 방식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원리는 주님과 주님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과, 지금도 하시고 계신 일들, 심지어 앞으로도 우리에게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기뻐합니다. 거기에서 이 참된 기쁨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상황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기쁨은 이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는 기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긴밀한 사귐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죽음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은 이 세상과 세상의 괴로움 앞에서도 웃게 해 주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비밀이 있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 영광으로 돌아가는 작은 관문입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