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새벽설교 25 (빌3: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진리가 놀랍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자료 : 조나단 에드워즈 "칭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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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사도는 4-14절에서 말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모두 해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빌3:9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한 이유를 한 번 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핵심은 “의의 문제”입니다.
의(義)가 왜 그토록 핵심적인 문제인가
의(義)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욥에 의하면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9:2)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핵심 문제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그 대답을 복음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에게는 다른 모든 것들이 하찮게 보인 것입니다. 사도 자신에게 있어서 그토록 기뻐하고 자랑하던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즉 “자신이 의존했던 속성(屬性)의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사도에게 있어서 그 위대한 발견을 가로막던 것들이었기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문제는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특히 의(義)는 바울의 중심교리입니다. 사도는 거의 모든 서신에서 이 교리를 설명합니다. 고전1:30절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핵심교리
바울의 시각 중에서 의(義)를 이해하는 시각만큼 독특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의 주제가 바로 의의 주제입니다. 의(義)는 사도의 교리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의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바울의 그 어떤 가르침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마르틴 루터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도 의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는 것은 특히 로마-카톨릭의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유대교로 회귀한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교리를 루터가 깨달았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사실은 이 진리를 모든 영역에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역사는 이 진리를 깨달을 때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교리야말로 그 어떤 말보다도 놀랍고 경이로운 진리입니다. 이 교리는 엄청난 교리입니다. 사도가 그토록 고귀한 깨달음이라고 주장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이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도 동시에 다른 것들은 전부 배설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라는 정의(定意)
먼저 이 교리를 접근 하는 방식은 “의(義)”라는 말의 정의(定意)부터 아는 것입니다. “의(義)”는 정의(正義)와 의(義)를 공히 가리킵니다. 의(義)는 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1)첫째로는 법이 명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2)둘째로는, 법에 정해진 대로 재판하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❶ 법이 명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은 21-22절에 언급됩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사실상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는 완전한 순종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의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는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십니다.
❷ 그리고 하나님은 법을 집행한다는 의미에서 의는 롬3:25-26절에 나옵니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의는 정의(正義)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이 정의(正義)롭게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정의롭게 죄를 사하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義)
이로 볼 때 ❶ 첫째, 의(義)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하) 하나님이 의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볼 때, 나타내신 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를 거저 주신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놓고 자기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적인 무능함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의(義)를 거저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❷ 둘째 하나님의 의의 특징은 하나님이 의(義)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을 말미암은 것이니 ......”(빌3:9절 상)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로워지게 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義)의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것입니다. 고전1:30절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교리는 우리의 믿음이 일부라도 의(義)에 기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義)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서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죗값을 치를 수도 없고,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채울 수도 없습니다. 의(義)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단지 의(義)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장치의 역할”일 뿐입니다. 그분의 의(義)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분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그분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어서 그분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분의 의를 내 의로 받아 누리게 됩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장치의 역할”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결론과 적용
결국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믿음으로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그분의 모든 것은 곧 내 것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만, 그 상은 우리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의가 가장 고상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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