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누리고 싶었던 사도
빌립보서 새벽설교 27 빌3장12-14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1. 사도의 열망
1.1. 사도가 갈망,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본문은 사도 자신의 현재 신앙을 밝히려는 데서 나온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유대교인의 입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사람이 되고자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입장이 얼마나 선명하게 감동적으 변화되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고상한 지식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길 원했습니다.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의 결의요, 신앙고백입니다.
1.2. 복음에 대한 바른 깨달음
사도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을 얻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10절)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우리" : 바울이 뛰어난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고백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같고, 이 갈망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됩니다. 사도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경험한 신앙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경지는, 우리도 동일하게 알고 경험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경험되어야 할 신앙의 경지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 있고,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집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경험도 잘못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열어준 가능성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
2.1. 본문에 대한 그릇된 주장
❶ 아직도 잡으려 한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본문에 대해 해석할 때, : “바울이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위대한 사도가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했는데 누가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겠느냐 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❷또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구원의 확신은 얻었지만, 사도는 부활에 이르려고 하지만, 아직은 부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2. 그러면 우리는 사도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❶첫째, 그리스도가 바울 자신을 붙잡으셨고, 지금 바울 자신을 붙잡고 계십니다. 사도는 지금도 어떤 특별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사도는 여기서 자신은 “붙잡힌바 된, 붙들린바 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곧 바로 “그것을 붙잡으려고, 손에 쥐려고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 붙잡혔습니다. 사로잡으셨습니다. “잡힌 바”(apprehended) 되었다는 말은, 조사를 받기 위하여 경찰에게 체포된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체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체포되었고, 지금도 그리스도 체포된 상태에 있습니다.
❷둘째, 체포된 그 상태는 또 다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말합니다. 또 다시 모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이 바울을 붙잡은 목적이 무엇인가?” 단순히 그를 죄 사함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자기 의'를 세우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도, 교회를 핍박하던 일을 그치게 하려는 것만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를 붙잡으신 것은 적극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것은 특별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부터 그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를 충분히 온전히 알게 하시기 위함”이이었습니다. 그를 닮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사도가 자신 앞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그분과 온전히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이유입니다. 우리는 죄책에서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와 오염으로부터도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가 알게 된 목표는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처럼 죽는 것입니다. 범사에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에 재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의 열망이 되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진술은 “그런데 아직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라는 것입니다.
❸셋째,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는 분명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다른 의(율법의 의)를 버린 것도 확실합니다. 분명 장래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삶과 생활을 닮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직 부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세 번째 진술은 그가 이처럼 자신을 붙잡고 있는 목표에 아지 도달하지 못했기에 그 목표에 도달하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온 힘을 쏟은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행하여 달려가노라.”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3가지입니다.
결론과 적용
사도의 이 진술에 대하여 2가지 논쟁이 있다고 했습니다. ❶“사도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주장과 ❷“아직 부활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주장은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1.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온전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토록 뛰어난 사도도 말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사도는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아직은 어린 신자들에 비하여 좀 더 성장한 성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비교적 “온전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 땅에서 온전케 하시지 않습니까? : 우리는 정확한 대답을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추측하자면, 이 땅에서는 죄가 계속 영향력을 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스스로를 낮추어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불완전한 상태로 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2. 이 세상에서 이미 온전해졌다는 주장은 큰 오류입니다. : 기독교의 완전주의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검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은 너눔 낮은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견주어서 완전한 상태라고 말한 것도 오류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완전한 상태로의 성화는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주의자들은 한 순간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그러나 사도는 그런 교리를 부정합니다. “달려가노라.” “오직 한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상화는 한 걸음씩 달려 나아가는 것입니다.
3. 끝으로 우리가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확신의 토대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자신의 큰 열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에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때,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달려 나아갑니다. 우리는 그렇게 달려 나가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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