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에 유익한 글

기독교(하나님을 아는 지식)는 어떻게 확신하는가?

by 인천열린 2023. 1. 31.

주제 : 기독교(하나님을 아는 지식)는 어떻게 확신하는가?

본문 : 요한일서 4장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형제사랑을 강조함 사도는 여기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는 여기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사도가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방법만으로 유일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본문 해석입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구체적으로 사람이나,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 사랑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옳지 않는 주장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음(마22:37, 39) 왜냐하면 성경은 줄기차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사귐으르 가질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22:37, 39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순서를 바꾸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앞에 다른 사랑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3. "하나님 사랑"에서 "사귐"을 누릴 때 "형제 사랑"의 비중이 매우 크다.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귐을 누리는 것"과 직결됩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데 있어서 매우 중대합니다. 9-11절은 단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언급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본문 9-11절에서 말합니다. 12절은 다시 "형제 사랑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에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형제 사랑"은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형제 사랑"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때문입니다.

 

 

4. 확신을 얻는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직결됨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이런 질문은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마음에 가장 큰 질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요14:5절에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충분히 이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주님이 처소를 예비하신다고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신 분입니다. 우리는 땅에 속하고, 세상에 속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가 다 이해할 수있겠습니끼? 그래서 빌립은 주님께 요청 드렸습니다. "주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습니다."(8절)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싶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갈망입니다. 누구나 "확실성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너무도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변합니다. 이 세상은 불변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보고 만지는 모든 것들이 변하는 것들입니다.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늘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의 삶이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항상 인간은 안정, 확실성, 그 어떤 확신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저변에는 항상 이 마음이 깊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어떤 방식으로든 확실성을 추구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적인 확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확신을 얻어야 하는가?

 

종교적 확신의 특징은 무엇일까? 신앙 지식의 확신은 어던 특징이 있는가? 그리스도인,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의 확신이 견고하게 되려면? 요한 사도는 이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12절은 그것을 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버려야 할 것?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12)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앎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단계"를 가지고 유혹하는 모든 시도는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의미 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요1:18절에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합니다. 딤전6:16절도 "...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라고 단정합니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으로 특정한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사실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사자"의 나타났습니다. 이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분은 특정 목적을 위해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일시적으로 나타내주셨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출33:19-23) 모세는 그분의 등을 보았다고 묘사됩니다. 결국 "어는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5:7) 이와 같은 바울이 묘사는 신비주의자들에게 항상 싫은 말씀입니다. 어는 시대나 철학과 신비종교는 항상 결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듣기를 원합니다. 유형적인 무엇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식하고,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따나 직접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정신적 이상과 이단과 환각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직접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듣고, 어떤 이상을 본 것에 기초를 두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확신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보다 깊고, 강한 신앙의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후 문맥대로 입니다. 9-11절에서 요한 답합니다.

 

 

신앙의 확신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사도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 가운데서 나타내셨는데, 그분이 사랑이심을 알고 있다. 나에게는 이상이난 어떤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어떤 이상과 음성을 주실 수 있느신 분이시만, 나는 그것을 찾지도 않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기서 자신을 사랑으로 나타내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다. 나의 확신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 말이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렇다면 우리는 더이상 의혹에 사로 잡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절망에도 빠지지 않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또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가 강조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