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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유익한 글

그러면 우리는 외로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by 인천열린 2023. 2. 2.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의 ‘영적 발돋움’에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외로움", "이웃과의 관계를 적개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환상" 등등 이와 같은 걸림돌과 같은 것들이 영적 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추적했다. 그리고 그 걸림돌들을 각각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제시했는데, 그 첫 번째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장애물로 작용하는 외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다뤘다. 요즈음 우리 시대의 상황에서 아주 흥미로운 글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근원적인 외로움"(Loneliness of a human being)이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외로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의 고통

 

인간이 경험하는 공통의 원인 중에 하나가 외로움이란다.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털어 놓는 불만도 외로움이니, 극단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생애를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도 알고 보면 외로움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다양한 심신 고통의 원인으로 이 외로움이 지목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더 지나치게 경쟁적이며, 개인주의 생활에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 장년들이나 노인들을 더 극심한 외로움으로 몰아넣는다. 그 외로움의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에 오늘날 유행하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마음먹거나, 좋은 이미지로 변화시켜도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나눔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Loneliness of a human being)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회피하려고 노력한 외로움의 고통

 

그래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위협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 밀려오는 ‘본질적인 외로움’것이다. 우리 스스로 대면하기 힘들어하는 것도 이 ‘외로움’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는 상황을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고통을 피하는 데 있어서 매우 세련되어 있ㅏ. 고통이 마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회피 해 버린다. 해야 할 어떤 일을 찾아서 몰두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남으로 ‘외로움’의 고통을 세련되게 회피한다. 그러면서 혼자 남아 있는 때를 두려워한다. ‘본질적인 외로움’을 홀로 대응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홀로되는 것을 들여다보게 되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느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분주한 일에 몰두하고, ‘본질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힘쓴다.

 


 

외로움을 달래는 데 있어서 실패

 

외로움을 다스릴 수 없어서 다른 이에게 기대면, 그 관계는 서로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든다. 친구나 연인, 남편이나 아내도, 어떤 모임도 외로움을 달래려는 갈망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려다가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성숙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서로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면 우정과 사랑은 상처를 남기고 내 인생의 모퉁이를 돌아 저 멀리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가서려면 서로가 떨어져서 있어야 할 넉넉한 영역이 필요하다. 함께하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평안을 깨뜨린다. 우리는 왜 이렇게 외로움을 달래는 데 있어서 자주 실패할까?

 


 

외로움을 자신의 고독(solitude)으로 가져가라?

 

왜 이렇게 우리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 있어서 실패할까? 답은 이것다! 먼저 인간은 예외 없이 가장 깊은 곳에는 ‘본질적인 외로움’이 숨어 있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숨어 있는 이 외로움을 어떤 일이나, 자신의 큰 사명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무엇인가로 대신하려는 데 우리의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노력으로 외로움에서 오는 고통이 일시적으로는 해결될지 모르지만, 사실상 그렇게 해서는 ‘본질적인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나’라는 자신의 밖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실패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헨리 나우웬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오히려 우리 자신 안 쪽으로, ‘외로움’을 우리 자신의 ‘고독’으로 찾아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는 더욱 ‘외로움’을 밖으로 가져가는 경향이 많다. 역설적이지만 헨리 나우웬에 의하면 오히려 자신 안으로 가져가라는 것이다.

 

 


 

고독(solitude)이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독(solitude)’을 어떻게 봐야할까? 자연인들은 자신 안에서 차분하게 이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어떤 내공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듭난 심령에 자리 잡은 ‘고독’이란 ‘경건한 고독, 믿음의 고독’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가로 달래야 할 것 같은데,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거룩한 분별력과 판단력으로 작용할 고독’이 있다. “잠잠히 여호와만 바랄지어다.”라는 신인의 표현이 여기에 해당될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 안으로 찾아드는 이 ‘외로움의 근원’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묵상’일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찾아드는 외로움이나 어떤 난관을 대면할 때 나 홀로 또는 타인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영혼의 깊은 생각과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언제든지 찾아오셔서 내 심령에 깊은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언젠가 말씀으로 주셨던 여러 깨우침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우리는 말씀의 의미를 조합하고, 의미의 맥락을 잡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기대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한다.

이처럼 우리가 언제나 본질적인 그 무엇이나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하려고 하면 항상 거기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 깊은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경외심에 떨리지만 깊은 깨달음을 안고 현실에 돌아온다. 문제 자체로부터 좀 더 멀리 서서 그 의미에 집중하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와 찬양하는 감동으로 문제의 근원을 보게 된다. 그런 ‘경건한 고독’이라는 ‘거룩한 묵상’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고독(solitude 즐거운 고독)이 아닐까?

 


 

 

찾아들어가야 할 고독(solitude 즐거운 고독)의 자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

 

외로움을 사람에 의해서 달랠 수 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내 앞에 놓여있다. 그러면 그 자체만을 볼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그 이면에 무엇인가 뜻이 있는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일어났는가? 상황이 변하고, 환경을 개선해도 근원적인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나에게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거룩한 고독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문제는 나 자신과의 문제이며, 나와 내 안에 내주하셔서 일하시는 성령님과의 문제이다. 내 영혼과 성령님 사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나 환경은 그 나름 깊은 뜻이 있다. 그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내 인생 가운데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 모두 ‘믿음의 고독, 경건한 고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