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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 읽기

【하나님의 큰 일 04】 말씀의 빛으로 볼지라도, 그의 식견(識見)은 결코 좁지 않다.

by 인천열린 2023. 2. 15.

【하나님의 큰 일 04】 제3장 일반계시, 그 두 번째 단락

 

 

1. 계시의 기능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 이런 높은 견지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앞, , 자신의 주위의 모든 면을 바라본다. 그때 그가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그의 눈길을 자연과 역사 위에 하늘과 땅 위에 돌릴 때, 그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 알고, 경배했던 같은 하나님에 대한 흔적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모든 것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보는 것이 결코 좁지 않다. 그는 마음과 포부가 넓다. 그는 전 땅을 훑어보고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3)(고전3:23)

 

그는 그의 생명과 구원을 근거로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특별한 성격을 띠었다는 신앙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신앙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연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흔적을 찾으려는 태도를 취하게 하고 그의 손에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깨닫게 하고 인간의 잘못과 죄의 혼합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을 준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별하게 된 것이다. 일반계시에서는 하나님은 현상과 사건의 평상적인 과정을 사용하시고, 반면에 특별계시에서 인간이 자신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비상한 수단과 현상, 예언이나 기적을 쓰시곤 한다. 첫 번째 것의 내용은 특히 능력과 지혜와 선의 속성이지만, 두 번째 계시는 복음 아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만 미치고 특별은총에 의해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중생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로 구별될지라도 역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과 기뻐하심 안에 그 근원을 갖는다.

 

일반계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을 지으시고 어두움에 빛을 비추시며 오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시는 그 말씀에 은혜를 입고 있지만(요 1:1~9),(요1:1~9), 특별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어 진리로 충만한 말씀에 은혜를 입고 있다(요 1:14).(요1:14). 전자는 일반적이고 후자는 특별할 뿐 두 계시의 내용은 은총이지만, 또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절대 필요한 것이다. 특별계시를 가능케 하고 그의 길을 예비하여 후에 그것을 지탱케 하는 것은 일반은총이다. 반면 특별은총은 자기 차례가 되어 일반은총을 자신의 것에 이르게 하고, 요긴한 것이 되게 한다. 두 계시의 결국은 인류의 보존에 있으며, 처음의 것으로 인류를 존속시키고 두 번째의 것으로 구원하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모든 덕에 영광을 돌리고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2. 계시의 내용

    

일반계시는 그것이 자연으로부터 나올지라도 성경 안으로 흡수되어 있다. 이는 우리 어두운 이성 때문에 우리 인간이 그것을 완전히 그 자연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창조 자체가 계시의 행위이요. 따르는 모든 계시의 시작이요 원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조를 가르치면서 그와 더불어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하나님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임을 나타낸다.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계시는 오래전에 성취하셨던 하나님의 사역을 상기시키는 자요, 우리의 이 세대에서 하나님이 지금 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이고,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 하는 증거자다. 더구나 자연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행하시고, 그분의 사업을 이루신다.

 

이런 일반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때가 찬 경륜의 시대까지 백성들을 보존하고 인도하셨으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롬 11:25,(롬 엡엡 1:14, 계7:9). 구원받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성의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이 자기들의 모든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 올 세상 그 끝 날을 준비하고 계신다.(계 21:24,.(계 26)

 

● 첫째, 만물은 최종적인 원인인 영원하고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요구한다(우주론적 증명)

 둘째, 세계는 우연으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있음을 나타낸다.

 셋째, 모든 인간 의식 속에 그 이상 더 높은 자는 인식할 수 없고, 누구나 자존하다고 생각하는 초월자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인데, 그것은 거룩하고 의로운 입법자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다섯째, 종교 없는 사람들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종교적 감정에 절대적인 보편성이 있음을 증명하고 여기에서 인간은 일반적으로 미련한 미신으로 앓고 있거나 모든 사람들 앞에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숭배는 하나님의 실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음을 깨닫는 그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같은 식으로 성경의 빛으로 인간역사를 볼 때 어떤 절대자가 만물의 다스림을 가르쳐주는 계획과 그 진행을 보게 된다.

 

그러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은연중에 역사란 이념과 계획에 입각한 것이고 그의 과업은 이 이념을 드러내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시 14:1).(시14:1). 또한 이방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다(롬 1:21).(롬1:21). 자연과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온 하나님의 계시일지라도 인간 스스로 그것에 응답하는 한도 내에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의한 모든 사역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영혼 속에 심어 놓으신 실존과 존재가 없었던들, 알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의 외적 계시에다가 내적 계시를 덧붙였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역사적인 탐구는 때때로 종교란 그런 생득적인 개념 없이는 설명될 수 없음을 돋보이게 한다. 성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직접 그분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서 창조하셨다(창 1:26)(창1:26)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다(행 17:28).(행17:28).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 밖에서도 계시하시고 인간 안에서도 계시하신다. ,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되 인간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증거 하도록 하신다. 그것은 그분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계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능력이요, 감수성이며 충동이다. 그것은 눈이 빛과 색깔을 탐지할 수 있고 귀가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 밖에 있는 신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우리 속의 신적인 의식이다.

 

칼빈이 말하는 대로 그것은 신적 감정이며, 바울의 정의대로 그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한 것을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피조물로부터 생각하여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 직접적으로, 우리는 피조 되었고, 제한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임을 의식한다. 이런 의존 감정은 낙담과 절망 속에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에 귀의하게 하고 신성을 영화롭게 하고 경배하게 한다. 그것은 자유를 내포하고 행동의 자유로 몰고 간다. 그것은 노예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자식으로서, 즉 잃어버린 자식이 갖는 의지이다. 그래서 칼빈은 신적 감정을 동시에 종교의 씨라고 했다.

 

 

오늘의 기도

 

맞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여주는 극장과 같은 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여주신 자연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너무도 허기지고 굶주렸습니다. 우리 영혼은 거기서 미친 듯 무엇인가를 찾았고, 거르다가 길 없는 방황의 세월 보내야만 했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광야를 나선 선한 목자처럼 우리를 만나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너무도 특별한 방식으로 구원의 손을 저희에게 내밀어주셨고, 우리는 떨리는 몸으로 주님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영혼의 쉼을 얻었습니다. 자연에서 성경으로 성경에서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에서 삼위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기독교 신앙의 길은 주님이 오신 길입니다. 그 영광의 길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칩니다.(요 12:13).(요12:1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