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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❶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by 인천열린 2023. 3. 19.

출17장1-7 주전230319설교동영상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 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악의(惡意)에 찬 죄악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행위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이 자신 안에 계시지 않기를 바라는 악의가 가득함입니다. 이런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1. 본문해설

 
1.1. 광야의 노정과 우리의 인생 길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말씀을 따라, 노정(路程)대로 광야의 길을 진행하던 과정에 일어난 사건 속에서 주시는 교훈을 받기 위해서는 꼭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마라를 지나서 신 광야, 그리고 이제 시내 산을 가까이 두고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마라의 쓴 물을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심지어 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이 광야의 노정은 우리의 인생길에 비춰볼 수 있도록 성경은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주목하라고 명령하는 듯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고된 길은 우리의 인생길 자체를 보여줍니다. 물이 없는 상황은 매우 당황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음식보다 물의 문제는 더욱 심각할 수 있습니다.
 
 
1.2. 여호와의 명령대로 가는데 왜 불평하는가?
 
1절에 “여호와의 명령(페, 입, 발성기관)”을 따라가는 노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물이 없는 것과 같은 당혹스럽고 두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까? 그런 의문이 들고, 또 대부분 우리는 이럴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쉽게 윗사람을 원망합니다. 그 대상이 부모가 되기도 하고, 우리의 지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제일 먼저 위로부터 온 권위에 불평하고, 원망(3정의 ’: 불평, 분개, 분노)합니다. 모세의 인도하는 방식에 분개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인도받는 것에 대하여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식을 두고 바른 판단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지점에서 이와 같은 원망과 불평을 자주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갖지 못할 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마가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 대상으로 누구를 삼든지 상관하지 않고, 원망하는 죄를 저지르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납니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산다고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의 상황에 따라 너무 자주 주변과 환경과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함께 자신의 불평과 원망을 마음에 품고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본문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고발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1.3. 그 원망과 다툼의 정체는 무엇인가?
 
모세는 이런 악한 행동은 "여호와를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시험한다.”(동사, 나사 ---> 명사, 맛사)는 말은 "❶유혹: 잘 못되도록 꾀다." "❷테스트 : 무엇을 입증시키다." "❸악하게 시도, 도발? : 거슬리게 도전하다. 감히 그렇게 말하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16절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라.”
 
모세는 7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풀어서 책망합니다. 7절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라고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명령(말씀)대로 노정을 이끌고 있는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분개했다는 것입니다. 방식을 싫어했습니다. 그 방식을 없애고 싶었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까?
 
우리의 인생을 두고도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인도 방식을 싫어했거나 원망했는지"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마음에 품고 살았냐는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악행을 여기서 우리에게 지적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철저히 회개해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부끄러운 생각과 말과 행동거지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수치를 회개합시다.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감사하고, 그분께 예배하고, 경외하는 태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그 분 안에 기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분문을 통해서)

 
2.1. 35일자 성경읽기와 묵상
 
지난 3월 5일자에 맥체인 성경 읽기 표에 따라 그날에 읽을 곳이 출17장 1-7절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자주 제 생각과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말씀으로 역사되었습니다. 늘 묵상되었고,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우리와 내 인생에 함께 하시는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나를 너무도 아음 아프게 했습니다.
 
 
2.2. 아버님 사고현장과 두려움
 
다 다음 날, 수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친구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차분하지만 매우 다급한 어조로 시골의 아버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요일 오전10:30분경에 전북 순창 구림면 농협조합장 선거 현장에 1톤 트럭이 돌진하는 사건이 전국에 톱뉴스로 전해지기 시작하던 때가 12시 경이었습니다.
 
우선 같은 마을에 사시는 우리 아버님을 전화로 위치를 알아내야 했습니다. 온통 두려움과 떨리는 전화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2시간이 지나서 뉴스에 대대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 뒤에 드디어 아버님께서 울먹이시는 목소리로 당신의 위치를 알려왔습니다.
 
88세 노인이 지치고 슬픈 목소리로 현장의 상황을 알려 주셨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내용보다 더 참혹한 현장을 알려왔습니다. 당신 아내인 저희 어머님을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다녀와서 앉아 있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차량을 옆을 지나갔습니다. 옆의 의자가 날아갔는데 어머님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날아갔습니다.
 
너무 놀란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는데 그 앞에 2-3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시신으로 중상자로 쌓여 있더랍니다. 당장 어머님을 찾아야 하는데 어머님은 아버님 화장실 다녀오시는 시간에 그 자리를 벗어나서 마을버스에 다급하게 올라 탑승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현장의 모든 시신과 부상자들을 다 확인해야 했답니다. 당신 말로는 5명 정도가 죽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트럭 아래 차량에 낀 시신을 빼내는 장면에서는 분명 어머님일거라는 생각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없는 어머님을 찾아 2시간 동안 동네를 정신이 나간 상태로 헤매고 다니셨던 것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아버님이 실성하신 분으로 여길 정도였답니다. 정신적인 충격과 함께 찾을 수 없는 2시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집에 어머님이 도착했다는 동네 사람들이 확인해주서 그때 마음으로 놓고 겨우 집으로 오셔서 통곡을 하셨답니다. 당신에게는 가장 충격적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2.3. 새벽마다 기도했던 아버지
 
22년 11월부터 새벽기도에서 아버님을 위한 기도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과 상황과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아버님의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아버님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고 이번 사건을 통해 온 가족이 놀라고,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감사한 마음이 교차하는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지 아닌지? 그런 생각에 대하여 말씀으로 충격을 주시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상황적으로, 사건과 환경을 통해서도 주셨습니다. 지금도 고향에는 그 충격으로 시끄럽습니다. 한 사람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고하기에는 너무도 큰 충격적인 사고였습니다.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성령께서 깊이 인식시켜 주시는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번 사고와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가르침에서 배우게 됐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3. 영적인 사고방식(프레임)으로 전환하라.

 
3.1. 어떤 일에 대해 막연한 생각에서 하나님께 간청하고 탄원하는 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어떤 일을 수행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막연한 생각으로) 그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뤄질 그 일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고, 기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프레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고, 우리 하나님 그 선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이, 믿음 없는 막연한 생각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려는 때, 또는 어떤 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단지 막연한 생각과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럴 때에, 나와 내 생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은 그분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잘 될 거야,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사고방식(프레임)에서 하나님께 의탁하는 생각,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라는 사고방식(프레임)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3.2. 하나님 함께 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생각 악의적으로 증명을 여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지 아니 계시는지?” 이 프레임이 아닙니다. 나의 옳은 깨달음과 확신, 즉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지를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 라는 프레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 전제를 기반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과 생각과 의도에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분을 인식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의 프레임(사고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데는 이런 악의가 가득했습니다. 헤롯이나, 빌라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심지어는 마4장에 등장하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랬습니다. 마4:5-7절입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막연하게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온 몸으로,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과 감각으로는 더듬어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말씀과 성경을 떠나서 다른 방식이나 다른 원리로 알려고 하거나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오류에 빠집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계시는가? 아닌가? 라는 생각은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신앙의 늪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내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라는 사고방식(프레임)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출17:1-7)의 사건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3.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능력을 알게 헤 달라고 구하라.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달려 나가서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사고방식(프레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것인가 아닌가?” 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능력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능력을 알게 되느냐? 여전히 모르거나 망각하고 있지 않느냐?” 라는 문제로 전환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매우 중대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엡1:18-19절입니다.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결론과 적용

 
이렇게 사고방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그 고약한 굴레에서 벗어나 드디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 이 시간 꼭 필요한 일이며, 반드시 그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변화 되어야만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심을 인식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모세와 다투는 것 같은 불필요하고, 불신앙적인 생각과 태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이루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적인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모든 일에 있어서 막연한 기대와 소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실천적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로서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까? 나와 우리, 나의 생애와 우리들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모든 세력을 동원하여 우리를 막연한 기대감에서 만족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먼저 의탁하는 그런 사고방식(프레임)을 철저히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력이 있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우리 중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가? 아닌가?”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우리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인식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라는 사고방식으로 바뀌어야하고 모세와 같이 이 상황에서 기도의 실천을 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기도라고 해서 다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의 형식만 갖출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명력 있는 기도와 믿음을 소유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사고방식(프레임)을 바꾸십시오! 그렇게 되지 않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능력을 달라고 구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능력을 알게 해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셔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자녀 삼으셨는지, 그분의 능력을 알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구하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그 기초 위에서 주님께 나아가기 바랍니다. 복음에 계시된 진리를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