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장27-30절 주전230416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6)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들어가는 말
주님께서 누군가를 찾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인가? 단지 육체적인 쉼을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이 땅에서 마음과 영혼의 쉼을 누리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1)주님 밖에서 마음과 영혼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수고와 고달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부르시고 계십니다. 동시에 2)주님 가까이 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신자들은 여전히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찾아 부르시고 계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마음의 안식과 쉼”을 얻게 하신다는 것일까?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주님이 찾아 부르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1.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누구일까?
주님이 찾아 부르시는 대상은 분명하게 지명된 사람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28)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차원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인가? 우리가 본문을 대할 때마다, 그들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본문의 문맥을 따라 살펴보면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27절에서 "계시를 받은 자"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를 아는 자"라는 말씀에서 확인되는 바입니다. 전 단락(20-24절)에서도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이 주님의 권능으로 “계시하여 증거 하셨던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문제로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도 13-19절에서는 세례 요한의 증거와 주님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이 모든 주제의 핵심은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구원받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주님이 찾아 부르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 모든 인생의 최종적인 핵심문제는 뭘까?
보편적으로 모든 인생은 누구나 종교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물론 망가진 상태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로 태어납니다.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 종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한 하나님을 찾아 살아가는 삶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상태를 사람들은 막연하게 표현하여서 "행복을 찾아가는 존재, 영원한 행복을 찾아가는 존재"로 표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영원한 세계를 갈망하는 존재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 없듯이 자신이 사는 이유도 단지 막연한 행복을 찾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아무튼 이 모든 사람들을 주님은 어떻게 규정하셨습니까? 주님은 여러 곳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문제에 걸려 있는 사람들”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문제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구원에 이르는 문제”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인생들의 핵심적인 문제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문제, 즉 구원받는 문제”로 규정하시고 계십니다.
1.3. 여러 방향으로 하나님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의 수고
결국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볼 때, 모두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결국은 구원에 이르는 것”을 인하여 고달프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한 것입니다. 인생들이 그런 상태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주님이 인생을 진단하시는 내용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핵심적인 문제를 다른 데서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1)돈으로 성취될 여유와 걱정 없는 삶을 찾고, 2)또 어떤 사람은 육신과 정신적인 건강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찾아다닙니다. 3)어떤 사람은 더 많은 깨달음과 지식을 얻고 싶어 더 많은 배움을 찾습니다. 4)또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게 풀려야 것에서 자신의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각자 자신이 생각 한대로 수고하며 삽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의 찾고 구하는 것은 스스로 알지 못한 가운데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구원받는 문제”라고 주님은 규정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 상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1.4.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십니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문제의 핵심을 붙잡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생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 또는 “하나님을 여전히 찾아서 방황하는 사람들”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수고와 고달픔이 될까요? 단지 육체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전도서 1:2, 8절입니다.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리고 8절입니다.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구원을 얻지 못한 상태가 딱 이런 상태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을 찾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밖에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2. 어떤 안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실까?
2.1. 주님이 주신다는 쉼(안식)은 무엇일까?
결국 주님이 주신다는 “쉼 또는 안식”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마음”이라는 용어에서 그 힌트를 얻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따라 “안식”을 얻게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의 쉼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먼 훗날 천국에서 얻게 될 안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아직도 “멍에(쥐고스)”를 함께 메자고 하신 것을 볼 때 지금 여기서 누리는 안식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이미 만나 구원을 얻은 사람들도 여전히 “멍에”는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으로 인하여 “마음의 쉼”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기서 주시는 안식은 육체저인 것도 먼 훗날 천국의 안식도 아닙니다. 현재 여기서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상태로 살아가는 중에 얻게 되는 “마음의 안식”인 것입니다.
2.2. 사람들이 왜 안식을 얻지 못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안식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27절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떠나 다른 데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나, 주님의 방식대로 계시를 받지 않는 자는 여전히 수고하고 고달품 속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데서 오는 수고와 고달픔입니다.
2.3. 그러면 우리 마음의 안식과 쉼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청교도 목회자인 존 오웬(1616-1683) 선생께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구원을 얻게 될 때,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진 성령님이시다.”(딛3:6)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로 받는 주된 선물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아주 명료하게 말합니다.(롬8장) 그리고 또 말하기를 “우리는 본질상 ‘정욕의 원리’로 살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고 우리 마음에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방식은 무엇이냐면, “우리의 ‘정욕의 원리’가 차지하고 있던 마음의 자리에 ‘은혜의 원리’를 주심으로써 이뤄진다.” 라고 말합니다. (존 오웬의 ‘교제’)
신자 안에는 "항상 있는(상존하는)은혜"가 우리에게 “은혜의 원리”로 주어진 것입니다. “신자 안에 항상 있는(상존하는) 은혜”가 바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의 법(원리)은 우리 안에 “상존하는 은혜” 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주시는 “항상 우리 안에 있는 은혜”는 1)우리의 이성 속에서는 빛으로 역사하고, 2) 의지 속에서는 순종으로 역사하며, 3) 감정 속에서는 사랑으로 역사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은혜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역사됩니다. 거기서 우리가 영적인 의무들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따르게 기꺼이 사랑의 마음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누구나 실제적으로 능력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도 여기서 해당됩니다.(요15:5)
2.4. 신자들 가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눌린 사람들
29절에서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주시는 안식과 쉼은 우리의 각종 의무나 사명을 내려놓는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다는 안식은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29) 라고 하신 데서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물론 주님 밖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초대하시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들에게 좀 세밀하게 적용하자면, 여전히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상태인데,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 속에서 빗나간 신앙개념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고단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신앙생활의 그릇된 개념을 가진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수고와 고달픔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의 수고와 헌신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어떤 보상으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신앙개념입니다. 여전히 은혜의 원리를 떠나서 자신이 성취한 결과에 대해 어떤 것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즉 보상심리가 은혜의 원리를 가로막습니다. 거기서 거칠고 사나운 신앙생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닮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미 주신 구원의 은혜와 주신 모든 은사를 제대로 알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 대해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수고와 헌신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나 하나님께 그 어떤 인정을 받아야 할겠다는 생각과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은 거기서만 마음의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항상 그런 신앙개념에 빠져 삽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오늘 부르시고 계십니다. 무엇인가 자신이 받아야 내야하고, 그렇지 못하면 억울한 심정을 가진 상태로 살아갑니다. 신앙의 보상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노력의 대가를 받아야 할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주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쌓이고 굳어지면 결국 자신의 구원이 마치 자기의 노력과 헌신의 대가로 주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오만한 신자가 됩니다. 결국 주님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에서 멀어진 마음의 상태가 고달프고, 무거운 짐에 눌려 살아가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론과 적용
창15:1절입니다.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미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상급도 다른 데서 찾기보다는 근원적으로 볼 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브라함에게 상급이요, 보상이라는 말입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것인데 그것도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상급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고, 거룩하신 우리 주님을 누리는 삶으로 집약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정욕의 원리에서 벗어나, 이제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신 성령님, 항상 우리 안에 상존하는 은혜는 우리가 모든 영적인 의무를 이핼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원리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의 멍에가 가벼운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원리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6)끝까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는 어떻게 위로를 얻는가? (0) | 2023.04.23 |
---|---|
주기도문과 기도 실천(8)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1) | 2023.04.18 |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4)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하나님 (0) | 2023.04.09 |
요한일서 1장 연속설교 듣기 (0) | 2023.04.03 |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❷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0) | 2023.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