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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새벽설교 시리즈

빌립보서 새벽설교 05 (빌1:9-11) 우리에게 왜 이토록 총명이 소중할까?

by 인천열린 2023. 4. 28.

빌립보서 새벽설교 05 (빌1:9-11)(▶동영상)
 

우리에게 왜 이토록 총명이 소중할까?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들어가는 말

 
사도는 왜 여기서 사랑에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원했을까? 총명이 이토록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총명을 어떻게 갖게 되는가? 총명(αἴσθησις, 아이스데시스)이 우리의 삶과 신앙에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사도의 기도에서 간구하는 요점

 
1.1. 총명이란?
 
여기서 "총명"(αἴσθησις, 아이스데시스)은 "지각이나 감각"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 사랑을 모든 감각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여기서 아이스데시스(αἴσθησις)는 "분별력 또는 판단력"이라고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지식과 분별력을 구분하여, 우리에게 지식이 아무리 많다고 해서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는 것이 많아도 판단력(αἴσθησις, 아이스데시스)이 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도는 성도들을 위하여 지식에 "판단력"이 더 풍성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1.2. 왜 그토록 분별력이 절실했을까?
 
사랑에 진리를 앎으로써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사랑과 지식의 균형을 구했던 사도가 이제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여기서는 "분별력"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판단력이 발휘되지 않는다면 지식은 쓸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단지 성경의 교리만을 알고, 그 지식만을 소유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리적인 이론만을 아는 데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분별(판단)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자들의 주장이 진리에 속한 것인지, 사람들의 주장이 이단과 사이비에 속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주의자들과 이방(그리스) 종교에 의한 이단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그것들은 당시에 기독교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별의 영"과 "판단의 영"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1.3. 삶과 신앙에서 분별의 영(능력)
 
"분별의 영(능력)"이란? "기독교의 진리"에 가까운 것이지만, 동시에 "본능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식의 정보는 전수할 수 있어도, 지혜(무엇을 분별하는 분별력)는 남에게 넘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분별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기도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나 다양한 상황에서 해야 할 분별과 판단, 그리고 신앙생활의 중심에서도 선악을 구별할 수 있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복음을 제시하는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거짓 가르침이 난무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선생을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는 얼마나 위험한 가르침을 가지고 나타나는지를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더욱 교회에 진리를 분별하는 영이 필요하며, 분별력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생활이나 성경교리에 있어서도 무엇이 옳은지를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여러 가지 난관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별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는 당시 교회의 성도들에 이것을 주시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2. 이것을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1. 지극히 선한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그것을 구하는 이유는 이 지식과 분별력이 있어야 "지극히 선한 것"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중요한 것"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총명이 있어야만 "신앙에 중요한 것"을 알아보고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의 "지식과 총명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삶에서 항상 어려운 숙제는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분간 해 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밀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분간하는 기술이야말로 삶의 기술입니다. 삶과 신앙에 중요한 것을 집중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1차적인 것이 아닌 것에 골몰하다가 거기에 힘을 소모하여 시간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이제는 삶의 어려움과 방해물과 모순된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삶과 신앙에 꼭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요구됩니다.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붙잡고 나머지는 버릴 줄 아는 힘이 필요합니다.
 
 
2.2. 사도에게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나?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기도를 통해서 이것을 집중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다가 보면 집중해야 할 것이 있겠지만, 항상 다음과 같은 일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그리고 그 온전한 순종과 그 의미들을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과 권능을 아는 데 이르고,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무슨 일이 닥치든 어떤 사건이 벌어지든 주님 안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철저히 "사랑에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 봅니다. 여러 가지 일에 바빠서 정작 중요한 일은 우리는 잊고 살기 쉽습니다. 중요한 일을 알아보고, 그것에 집중하는 감각이 우리에게 생겨나야 합니다. 사도는 이런 분별력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2.3. 사도의 소원 : 점점 순결해지는 것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우리에게 다가 오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심판 받을 날을 준비하며 삽니다. 우리는 그 날을 위하여 삽니다.(고전3:11-15)
 
그 날에 인간의 공적들을 모두 판단하는 큰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인정받은 공적은 상이 주어지겠지만, 인정받지 못한 공적들은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구원을 "불 가운데서" 받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허물없이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려면 순결해야 합니다.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져서 그런 것들의 차이를 보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순결하게 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날을 준비해야 하빈다.
 
 

결론과 적용

 
우리 앞에 심판과 그리스도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 그런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 이유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랑에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영혼과 생명과 하나님과 그 모든 것을 묵상함으로 풍성해집니다. 그리하면 의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교리를 무릎으로 이해되기를 바랍니다. 삶이 비틀거리지 않고, 소중한 일에 집중하며, 이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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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성경사전 자료)

총명(αἴσθησις 아이스데시스)은 "지각" 또는 "이해"로 해석됩니다. 이 용어는 "감각"(sence)에서 감각 기관을 뜻하며, 영혼의 수용 능력, 분별력, 명상하는 능력, 선한 것을 향유하는 능력, (욕망의 무가치함을) 판단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참된 통찰력(다아트)"를 번역한 단어로 쓰였습니다. 이 통찰력은 "미숙"(잠1:4), "무절제"(잠12:1), "어리석음"(잠 15:7)과 대조되었습니다. 지식은 주로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통찰력은 보통 인간관계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인간 관계에서는 참된 통찰력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고 그에 알맞게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새벽설교 05.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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