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1-24)
들어가는 말
21절의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는 것과 이어서 사도는 23절에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라고 언급한 내용에서 오늘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입니다.
1.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1. 왜 사람들은 직시하지 않고 죽음을 회피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죽음을 회피합니다. 어차피 죽을텐데 굳이 앞장서서 미리 말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박합니다. 삶에 온 관심을 쏟으면 죽음이라는 현실을 잊고 최대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죽음에 직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청교도들은 항상 죽음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현대인은 생명보험과 같은 것으로 미래를 미리 대비하여 큰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정작 죽음에 직면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정반대의 태도로 죽음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히2:15절의 말씀에서처럼 "죽기를 무서워 함으로 한 평생 매여 종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 죽음을 폐하시고, 썩지 않을 것으로 나타내심
신약 성경만큼 죽음에 대해 영광스럽게 알리는 곳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관점을 살펴보면 이방 철학이나 교훈과 비교하면 월등히 바르게 접근합니다. 하지만 모호한 요고가 있습니다. 때로는 소망을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시편은 부활에 거의 접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시편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으로 불평하듯이 말합니다.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누구리이까?"(시6:5)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부터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밝혀주었습니다. "그가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라고 말합니다.(딤후1:10)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그리스도)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의 죽음에 대해 가장 명백하게 들러낸 것입니다. 특히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죽음 이후에 있을 영원한 생명을 밝히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1.3. 죽음에 도전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의 약속 때문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죽음은 부활에 의하여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부활이 정복되었습니다. 부활의 이 위대한 사건 때문에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죽는 것도 육익함이라."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주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14:1-4절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도가 이처럼 강력하게 죽음에 대해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이런 약속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2. 오늘 죽음에 직면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1. 사도처럼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진술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이면 누구나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이든 삶이든 오늘 쪽이든 사도는 모두가 자신에게는 갈 수 있는 길인데, 자신에게는 죽음이 더 유익하다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죽음보다, 사는 것이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철저한 그리스도인인을 나타내는 시금석입니다. 죽음이 현실로 닥쳤을 때, 나에게 유익하다고 생각이 드는지를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2.2. 세상은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세상은 대부분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심지어 죽음을 증오합니다. 사실 죽음은 사람에게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무서운 대상입니다. 공포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죽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회피하고 체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철저히 싸워서 물리치자고 말합니다.
2.3. 기독교는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죽음에 대해 어떤 인간의 용기르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음에 대한 승리를 말하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자신감과 확신에 차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3절에 "떠나서"라는 말은 "아나뤼오"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장막을 걷워들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은 유랑민이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사고에는 항앙 장막을 치고 거두는 일이 항상 의식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에 정착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죽음을 장막을 거두고 이동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눅16:22절에서 "천사에게 받들려"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다가올 때 신비한 일은 "천사에게 받들려" 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다음 세상으로 갈 때입니다. 마지막 행위를 할 때, 천사들이 우리를 받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란 이럭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분명한 소망, 죽음 이후의 우리의 본향 : 히11:14-16절입니다. 자신들의 본향을 찾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신 곳, 흔들리지 않는 도성이 우리의 죽음 이후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영원한 나라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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