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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후서 설교 03) 믿음으로 사는 실제적인 생활에 무엇이 필요한가?

by 인천열린 2023. 5. 20.

벧후1장5-7절 주전20230521

 

믿음으로 사는 실제적인 생활에 무엇이 필요한가?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5-7)
 
 
 

들어가는 말

 
믿음생활의 실제적인 면에서 권면을 받는 내용입니다. 무엇인가 힘써 공급하라고 말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배제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 믿음에 요청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다음 몇 가지를 반드시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시작된 우리가 신의 성품을 닮아갈 때 무엇이 필요한가?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5a)
 
 
1.1. 믿음의 시작과 성취
 
베드로 사도는 모든 성도들을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언급했습니다.(1절) 사도들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책임자 역할을 담당했고, 초대교회를 총괄하던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왜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했을까요? ❶이 믿음은 우리 스스로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분을 앎으로”(3절), 즉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심으로써 받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❷그리고 이 믿음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셨을 뿐 아니라 이 믿음을 완전하게 성취하실 날이 올 것이라는 "지극히 큰 약속"(4)에 담긴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고난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후의 날에 이 ‘보배로운 믿음’을 받아 믿음을 따라 사는 의인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그 믿음을 저버린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로써 믿음이 얼마나 보배롭고 영광스러운지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4)이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보배로운 소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에 보배롭습니다.
 
 
1.2. 믿음의 열매를 결실하기 위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이 믿음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실"을 맺게 하실까? 이 보배로운 믿음(1절)은 우리의 삶에서 "사랑(7절)의 열매로 추수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사꾼이 농번기에 수고하듯이 “보배로운 믿음으로” 사는 날, 우리의 생애 동안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여러 가지 필요한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5-7절에 담겼습니다. 5절 첫 머리에 “그러므로”(아우도스 토우토 αὐτός τοῦτο) 라는 이 용어는 "바로 그것" 이라는 뜻을 가진 것입니다. 사도가 이 용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해야만 할 텐데, "바로 그것"에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앞의 내용에 근거해서” 라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신자들에게 무엇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3. 질서 있고 조화로운 믿음
 
그 믿음에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절) 우리가 보배로운 믿음을 동일하게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3) 그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우리는 이제 정욕 때문에 이 세상에서 썩어질 사람들이 아니니, 그런 것들을 피하는 것은 너무 도 당연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이 온전한 삶을 이 땅에서 사시면서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우리도 그분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닮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들을 사도가 여기서 언급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질서 있고, 조화롭게 갖춰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보배로운 믿음에 균형과 질서 있게 갖춰야할 것들은 무엇일까?

 
5. ...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에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어 문제입니다. 믿음에 충분히 공급하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은 3 부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❶첫째, 사도는 우리에게 '믿음의 특성'입니다. ❷둘째, 사도는 믿음을 가진 우리의 '내적인 기질'입니다. ❸셋째, 사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2.1. 믿음에 (ἀρετή)... 더하라!” : 믿음의 도덕적 탁월함
 
먼저 사도는 '믿음을 받은 자들의 특성'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에 '덕'이 공급되어야 할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덕'이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서도 탁월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반적 의미로 '탁월한 성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가 여기서 '덕'을 언급한 것은 믿음을 가진 성도의 '도덕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도덕적 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믿는 자의 영혼의 활동’과 ‘그 영혼의 힘에 속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서신의 문맥으로 볼 때, 우리의 보배로운 믿음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믿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믿음은 능동적인 믿음이요, 건전한 믿음이란 힘이 넘치는 믿음이며, 대단히 활기찬 믿음이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그런 차원에서 믿음에 덕을 더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은 부족하고나 구체적으로 믿음을 발휘할 때마다 헛되게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덕목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연관된 덕목들을 믿음에 더해야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보배로운 믿음에 더해야 할 것은 “덕(미덕, virture)”을 더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믿음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일까?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인 능력"인데, 이것은 다시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❶먼저는 믿음에는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따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순종한다는 것이고, 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❷ 또한 믿음은 언제나 시험을 이기는 데는 인내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에 이런 덕목에 갖춰질 때, 도덕적 탁월성이 발휘될 것입니다. 결국 믿음에는 의무 수행에 요구되는 용기는 각종 시험과 시련에도 충분히 견디게 될 때 빛을 발할 것입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여 인내의 탁월성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이런 덕목들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덕목과 매우 비슷하지만, 믿음의 덕목이 세상과 다른 것은 이 덕목들이 “성령의 열매”(갈5:22)의 차원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런 덕목들이 우리들 상호간에 사랑에 공헌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생활에서 실천적이지 못한 것은 이 덕목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멸시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서 ...더하라”(5,7)
 
이처럼 건강한 믿음은 우리 자신을 능동적이고 활기찬 영혼의 특성을 가지게 합니다. 힘이 넘치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활발하게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배로운 믿음의 성격은 누가 자극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기다리기만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적극적인 믿음이며 생기가 도는 믿음입니다. "너희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2.2. “덕에 지식(γνσις)을... 더하라!” :
 
2절과 3절에서 "(지식, ἐπίγνωσις)으로...말미암음이라"(1:3)라고 언급되었습니다.
여기 5절에서 “덕에 지식(그노시스)을...더하라” 라고 할 때, 지식은 우리를 처음 믿음으로 인도하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되는 지식은 여기서 언급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실제적인 믿음생활의 통찰력인 것입니다. 믿음의 이해력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활동적이고, 힘이 넘치는 삶을 살 때, 더욱 빈틈없는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사도에 의해서 “영적인 무기력과 권태에 빠져 있지 말라.”는 권면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는 이어서 “덕”의 필요성을 말하고 난 다음에 덕과 함께 ‘지식’(통찰력, 또는 이해력)’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셈입니다. “너는 일어나라, 행하라. 강건 하라. 기회를 붙잡아라. 그리하여 너의 덕을 실행하라.” 그러나 그렇게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릇되게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릇된 열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활력 있는 믿음에는 세밀한 이해력과 통찰력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을 통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활력의 조절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베드로의 경험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매우 충동적이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베드로는 자주 후회했습니다. 단순히 열정과 활동에 압도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온갖 활동 지침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추진하는 선교단체의 활동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현상을 일으켰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멈추면 아무것도 없는 듯이 공허한 마음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믿음은 분명 활기찬 삶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활동하는 데에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베드로 자신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적 힘과 활동에 이성적 판단과 적절한 자기 통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우리는 말과 행동에서 언제나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바르게 성장하도록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실제적인 생활’에서 소극적이거나, 뒤로 물러나서 낙심한 자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활기찬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믿음은 잘 통제받기 위해서 지식(통찰력,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깨달아 얻은 지식이 우리의 활동을 통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제멋대로, 어리석게 단지 활동에만 빠져서는 안 됩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오늘 보배로운 믿음으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이 최후의 성취요, 완성의 날을 바라보며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 소망을 갖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날들은 그 성취의 날을 향하여 가는 여행과 같습니다. 그 도중에 우리의 믿음은 다양한 것들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질서와 조화로운 생활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공로 없이, 우리의 공적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덕’이 필요합니다. 생생하고 활동력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극적이거나 기다리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우 진취적이고, 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덕을 힘써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바르게 판단할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생활을 질서 있게 또는 조화롭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구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식별력과 분별력으로 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에서 하나하나 우리는 터득해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실제적인 지혜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생활의 실제적인 지식이 요구됩니다. 이 지식이 없으면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요소들이 요청됩니다. 힘써 공급해라는 사도의 권면을 귀담아 듣기 바랍니다. 믿음에 활기찬 우리의 생활을 지향합시다! 활기찬 생활에 우리의 통찰력이 우리에게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께 구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깨닫고 훈련되어 성숙한 믿음의 생활을 합시다.
 
지금까지 ①“믿는 자의 특성”(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더하라.)에 대해서 함께 생각했습니다. 그 외에도 ②“내적인 기질의 중요성”(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과, ③“타인과의 관계의 중요성”(경건에 형제우애, 형제우애에 사랑)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 두 가지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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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덕(德)이란? ἀρετή (아레테 arete- 덕 virtu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이레테(Homer 이래)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업적이나 타고난 재능, 또는 이 둘 모두에서 '탁월, 뛰어남'을 의미한다.
(b) '남자다움'이나 용맹
(c) 명예와 관련해서 칭찬받을 만한 '공적'이나 '행사'.
(d) 철학에서 '미덕'(virtue )
(e) 신들의 '자기 선포'. 호머는 신들의 아레테와 신들의 권능의 시위의 아레테에 대여 말하였다.
(f) '명성'(참조: O.Bauermfeind).
 
2. 70인역본의 용법
(a) 아레테는 70인역본에서 약 33회 나오며, 히브리어 테힐라(찬양할만한 행동, 여호와의 찬양, 사42:8,12; 43:21; 63:7)과 호드(위업, 영광, 합 3:3; 슥 6:13, 2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예문들 중의 어느 한 곳에서도 이 단어를 역사상, 여호와의 사역(여호와의 사역은 특히 이사야서에서 두드러지게 묘사됨)과 관련된 구약적 개념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헬라적 개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b) 아레테는 마카베오서들 특히 마카베오사서에서 자주 언급된다. 마카베오이서 6:31에서 엘리아잘(Eleazar)의 순교는, 그의 아레테(arete)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지칭된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0). 마카베오사서에서 아레테는 종종 믿음에 대한 순교자들의 충절을 의미하는데 이 충절을 그들은 고난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유지하였던 것이다(마카베오사서 7:22; 9:8,18; 10:10; 11:2; 17:12,17). 동시에 우리는 아레테에 대한 헬라적 개념을, 즉 담대함(마카베오이서 15:17), 용맹스러움(마카베오사서 17:23), 영리함(마카베오사서1:2), 또는 이성(마카베오사서 1:30) 등의 개념으로도 쓰인 예를 발견한다. 헬라적 영향은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곧 솔로몬의 지혜서 5:13에서 덕이 악과 대조되며, 또한 솔로몬의 지혜서 4:1에서는 덕이 불멸성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솔로몬의 지혜서8:7에서는 4가지의 플라톤적 기본 미덕들이 지칭되고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레테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빌립보서와 베드로전후서에만 사용되었다.
(a) 아레테는 빌 4:8에서 인간의 미덕으로써 '탁월, 우수'를 의미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라는 어구 등의 나열에서 이 단어를 '찬양(기림)'이라는 말 옆에 두는데, 만약 여기 나열된 것이 주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바울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의인이 삶과 죽음에서 유지해야만 하는 '탁월'(excellence)이다.
(b) 벧후 1:5에서 아레테는 미덕, 용기, 혹은 도덕적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것은 그리스도교인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부차적으로 얻어지는 용기이다. 또한 시험을 견디는 과정에서 발전되는 도덕적 능력이다(E.R.Fuhrman).
(c) 벧전 2:9에서 아레테는 하나님의 아레테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은, 70인역본 사 43:21의 인용이므로 목적격 복수 아레타스(aretas)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바와 같이(위의 구약성경 1을 보라) 찬양할 만한 행동들(praiseworthy acts)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과거의 백성들과 또한 새로운 백성들에 의해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벧후 1:3에서도 하나님의 아레테를 나타낸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본문에서는 더 많은 헬라 사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아레테와 함께 독사(영광)와 뒤나미스(능력)가 언급된다. 이곳에서 아레테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을 언급하는데 이 속성은 그 능력(뒤나메이스)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은사들을 부여하였고, 그럼으로 인하여 그들은 4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신의 성품(데이아스 퓌세오스), 즉 하나님의 완전하신 덕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참조: 마 5:48). 여기에 신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의 관련성이 있다(참조: 행 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