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새벽설교 1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1-5)
들어가는 말
오늘날도 지극히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각각의 나라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각 나라의 내부에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나라가 많습니다. 좀 더 좁게는 가족관계도 그렇습니다.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조차 붕괴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의 우리가 사는 시대의 상황입니다. 오늘날에도 혼란과 다툼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마침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연합과 화평”입니다.
1. 세상은 화평을 찾으나 찾지 못하는 이유
1.1. 화평이 없는 시대
사도는 서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이 단락의 주제는 연합과 화평입니다. 오늘날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는 바로 평화와 연합입니다. 서로 간에 일치된 연합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흘러나오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람들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연합과 화평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상황에 대에 세상에 어떻게든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가 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2. 세상은 왜 해결점을 찾지 못할까?
사도의 말에 비추어서 이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무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막연한 낙관주의”는 세상에서 항상 주장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피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살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본성의 죄”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세상은 “인간”과 “인간의 상태”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면서 피상적인 처방으로 일관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당면한 상황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요, 선언입니다. 화평과 연합의 문제에 대하여 사도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합니까?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2. 사람에게는 일치와 화평을 깨는, 그 무엇이 있다.
2.1. 세상의 화합을 깨는, 그 무엇이 사람 속에 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은 사람들 안에는 분쟁과 불일치로 이끄는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는 아주 높은 수준의 교회관(敎會觀)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나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적인 기관입니다. 중생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도 그릇된 원리가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어느 교회보다도 책망을 받지 않거나, 적게 받은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도 무엇인가 주의를 해야 하고, 자신들을 돌아봐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화합을 깨는 그릇된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화평을 망가뜨리는 그 무엇이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 속에는 분열을 조장하며, 의심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2.2. 다툼과 허영심의 문제
이는 사람의 마음에 숨은 “당파심”이 있습니다. 연합을 깨는 병적인 심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툼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일종의 파벌의식이요, 편당심입니다. 죄의 속성 중에 이것은 편파성입니다. 정치인들이 악용하는 추잡한 지역주의 같은 것들이 이것입니다. 전쟁도 국가 간에 자국이 우선하다는 생각으로 자릴 잡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 이익우선주의 사상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입니다. 단지 나라 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어느 지역사회도 그렇습니다. 지역사회 안에서 지역이기주의가 얼마나 이 세상의 화평을 망가뜨리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집단주의가 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거기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평을 깨는 가장 위험한 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파벌의식은 사실상 화평의 최대의 적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당파적 싸움은 너무도 유명한 일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전 1:12)
이런 주장들이 교회의 화평을 얼마나 망가지게 했는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장 성숙한 교회 안에서도 파벌과 집단의식이 사실상 예수의 정신인 연합의 정신을 망각한 가운데 다툼을 일으킵니다.
2.3.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의 태도
교회는 이제 좀 더 한 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절)
우리에게는 낮은 마음과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자기보다도 남을 낫게 여기는 태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알면 남을 더 낫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남의 일”도 돌아봐 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최선은 무엇인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힘들 때 우리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허영심, 즉 겉치레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지 않고 자신의 자랑을 위하는 허영심은 언제나 교회의 화합을 깹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2.4. 그럼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근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1절)
겸손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진정한 겸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한테 겸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만이 진정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우리가 이행하려면 먼저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진정한 겸손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경험한 일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권면할 수 있게 되고 설득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 또는 그 사랑의 영이 너희 자신을 권면하고, 설득하면 우리는 우리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진실로 성령의 교제와 사귐이 있다면, 이렇게 삶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런 사실을 나타내라고 말합니다. 긍휼과 자비가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계속해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신약 성경은 참된 연합과 일치를 이루려면 이처럼 먼저 “공동의 충성심”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우리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공동의 충성심입니다.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각 사람이 자기의 교만을 벗고 스스로 낮아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께 우리의 공통된 충성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겸손하게 되려면 십자가에서만 이뤄지는 그 일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중간의 담을 헐어냅니다. “중간의 막힌 담”을 십자가에서만 허물어집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온전한 연합을 이룹니다. 바울은 이런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그런 다음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매우 중대한 진술을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6-8절)
주님은 왜 이렇게 되셨습니까? 주님은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셨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돌아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이것을 실천하셨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근본적으로 “그분의 본성”, 즉 “신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중생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셔서 우리 안에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연합하고 화평의 길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옛 본성을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야 하고, 새로운 본성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연한과 일치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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