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3절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1-3)
들어가는 말
사도는 여기서 3가지 방면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러이러 한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며,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셋째로는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며” 라는 부분을 살펴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시금석 3요소
1.1. 복음진리의 반복적인 가르침은 교회의 사명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1차적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다시 복음을 반복적으로 언급하여 강조하고 있는 의도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거짓교사들에게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사도는 당시 유대주의 이단과 평생 싸워왔던 사람입니다. 이때에 이단의 가르침을 경계하게 하는 것은 매우 긴박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들이 복음을 알고 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단의 교설로 인하여 복음의 이해와 신뢰가 흔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가 복음을 더 깊이 가르쳐야 할 상황이 도래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어두운 상황에 있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도 필요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이처럼 복음진리의 반복적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며, 교회의 사명이며, 목회자의 핵심적인 사역입니다.
1.2. 거짓된 가르침의 위험성
유대교의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흔드는 치명적 요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저들의 주장은 당시 성도들에게는 독버섯과 같았을 것입니다. 유대교의 거짓된 가르침인즉,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 옛 언약의 완전한 성취를 불신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한 때는 물리적으로 대적했었습니다. 이제는 더욱 교묘하게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외면한 사람들로 점점 더 굳어져갔습니다. 그들이 바로 유대의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옛 언약에서 주셨던 할례를 자신들의 종교적 자부심으로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가 구원을 성취하신 것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 속죄일이나 안식을 붙잡고 철저히 얽매인 것은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데서 나온 거짓된 교리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단들 중에는 종교적 활동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상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구원이 주어진다는 복음진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과 오늘날 이단들의 주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것은 빌립보교회나 오늘날 우리시대의 교회에 매우 위험한 요소입니다.
1.3.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기쁨
결국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이냐? 라는 정의(定意)를 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인지를 살펴보자.”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쁨과 평안을 돕는 것입니다.
빌3:1절에서 사도가 말하기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것은 전체 핵심 주제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거짓된 가르침에 유혹되면 곧바로 기쁨을 빼앗김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고, 복음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에 계시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독교인은 참된 기쁨을 빼앗김 당하지 않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의 요한일서에서 강조하기를, 하나님과의 사귐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기 위해서는, ❶먼저 복음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❷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빈다. 그리고 ❸ 우리는 이단의 가르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1.4.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3가지 요소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과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앙의 기쁨을 상실하는 것은 우리에게 시험이 찾아오는 첫 단계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의무를 망각합니다. 그런 일이 점점 진행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합니다. 자신이 지금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점점 혼돈하기 시작하고, 간헐적으로 찾아드는 강력한 유혹들과 자신의 정욕의 힘이 강력하게 사로잡습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첫 단추가 뭡니까? 복음진리의 생생한 인식, 그 복음에 계시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바르게 알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 핵심적인 지식은 삶의 양태를 바꿉니다. 빌3:3절에 의하면, ❶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❷둘째, 그리스도를 기뻐하여 사랑함으로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❸셋째, 그들은 이제 바울처럼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생명적인 요소들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합니까?
2.1. 성령으로 예배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빌3:3)
본문의 “봉사하며”(동, λατρεύω)라는 이 용어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헬라어에서는 이 용어가 “종이나 일꾼들”에게 쓰인 용어입니다. 그러다가 노예나 일군들을 넘어서 종교의 제사에 봉사하는 사람에게도 쓰였습니다. ‘라트류오’(동, λατρεύω) 라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어의 성경에서 “아바드”(섬기다)가 대부분 종교적 제의에서 사용되었는데 헬라어 70인경에서는 라트류오(λατρεύω)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결국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단순히 ‘봉사하다’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도는 이 용어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관한 이해와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중대한 요소는 성경적인 예배관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억지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성려에 이끌려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함으로써 냉랭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모든 잘못된 예배를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곁가지 방편들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전례, 사제들, 심지어 어떤 형상 등등으로 도움을 얻으려던 로마-카톨릭은 사실상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일수록 주변의 도움과 친구들을 덜 의지합니다. 그러하듯이 하나님 앞에 홀로 있을 때에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는 똑같은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2.2.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느낍니까?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생각하거나, 아득히 멀리 있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느끼고 경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곁에 계심을 압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전능자의 임재의식을 인식합니다. 이것이 영적예배의 시금석입니다. 참된예배는 육체나 육체적인 습관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을 확실히 인식합니다. 요4: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육신적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히12:28) 궁극적이고 참된 예배는 영적예배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깨달아 경외심과 신적인 두려움으로 다가가면서도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에 찾아왔다면, 성령으로 인도받고 있는 자들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4)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를 알고, 성령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자세로 예배합니까? 혹시 억지로 하는 예배는 아닙니까? 진정 예배하고 싶었습니까? 성령께서 주신 마음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신 마음이요, 참된 예배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하십시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예배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마음을 드려서 예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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